이 논문은 김창겸 교수가 ‘신라문화’ 60호(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2)에 게재한 것을 저자와 합의에 의하여.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생략하고 재편집하여 수록합니다. <편집자>
이것은 신라 중고기에 재위 중인 왕을 법흥대왕·진흥대왕이라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황제적 위상을 지닌 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시대 국왕의 호칭을 대왕으로 했지만, 이 중에는 황제적 위상을 가졌던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사례의 하나가 경신대왕이라고 본다.
경신대왕의 시호는 원성왕이다. 그는 신라 하대의 새로운 왕통을 일으킨 중시조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것은 새로 오묘제의 제정에서 원성왕을 신라 시조 태조대왕과 함께 모셔졌고, 또’숭복사비’에서 공훈이 큰 선조, 즉 개국의 기업을 닦은 제왕을 의미하는 “열조”로 받든 것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제46대 문성왕은 유조(遺詔)에서 숙부 의정(誼靖)(헌안왕)을 “선황지령손(先皇之令孫)”이라 하였다. 이것은 헌안왕을 황손이라고 한 것으로 천자의 손자, 또는 천자의 자손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선황이란 선황제, 선대의 황제를 일컫는 약칭 용어로서 선제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영손이란 영포(令抱)라고도 하며, 아들의 아들(손자)를 말한다. 이것은 문성왕보다 앞선 시기에 황제로 직간접으로 칭한 군주가 있었고, 의정은 그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선대 중에 황제적 인물은 누구인가? 헌안왕은 아버지는 김균정이며, 조부는 예영이고, 증조부는 원성왕이다. 한편 헌안왕의 어머니는 조명부인(흔명부인)이며, 외조부는 충공이며, 외증조부는 인겸이고, 외고조부는 원성왕이다.
그러므로 헌안왕의 아버지 균정과 어머니 조명부인은 당숙과 당질녀 간의 친족(5촌)으로써 이루어진 근친혼을 했으며, 결국 헌안왕에게 부계로 증조부와 모계로 외고조부는 동일인으로 원성왕이다. 이러한 헌안왕의 선대 중에서 선황으로 지칭될 인물은 부계로든 모계로든 다같이 실제 재위한 원성왕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갈항사석탑기에 경신대왕으로 표기된 원성왕을 후손들은 황제에 비유되는 선대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경신대왕은 생존 재위시에 황제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이해하겠다. 다시 말해 원성왕은 중국 당에 대해서는 제후국의 왕이면서 신라 내에서는 황제적 지위와 의식을 지닌 외왕내제(外王內帝)로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2. ‘조문황태후’와 황실
갈항사석탑기에는 ‘조문황태후’라는 표현이 있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인 계오부인 박씨를 추존한 칭호이다. 다시 말해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의 아내이며, 창근 이간의 딸이다.
한편 ’숭복사비’에는 파진찬 김원량은 소문황후의 원구(元舅)이며 수정왕후의 외조부라 했다. 소문황후는 조문황태후와 동일인이다. 여기서 원구는 임금 또는 왕비의 외숙을 뜻하므로, 결국 소문왕후의 외숙이라는 의미이다.
김원량은 소문태후의 어머니의 오라비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성왕의 왕비 숙정부인의 외할아버지 또한 김원량이라고 한다. 숙정부인의 아버지는 김신술 각간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버지인 김신술은 김원량의 딸과 혼인한 부부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김원량의 가계는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태후의 모계이면서 또한 원성왕비 숙정왕후의 모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성왕은 모와 비를 통하여 김원량과 중첩으로 맺어진 인척관계에 있었다. 결국 김원량가는 김경신을 적극 지원한 유력한 진골귀족세력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인척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갈항사석탑기의 조문황태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이 석탑기에는 원성왕을 “경신대왕”이라 한 것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조문황태후”라고 표기하였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에 보이는 조문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인 계오부인을 추존한 칭호이다. 그녀를 황태후라고 한 것에서 매우 특별한 것을 알 수 있다. 태후란 독자적 위상을 가진 왕조에서 군주의 어머니를 부르는 칭호이다.
태후의 정식 명칭은 왕태후·황태후이다. 당의 후비제에서 황후는 황제와 나란한 존재로서 궁궐 내의 내조를 관장하였다. 이에 비해 황태후는 예제적 측면에서 황제의 일원적 지배질서 체제에서 독립하여 존재하였다. 중국의 후비제에서 황후를 최상위로 하여 내직이 조직되었기 때문에 황태후는 후비제 내에 위치하지 아니한 초월적인 존재였다. 결국 황제-황후를 중심으로 한 궁정조직에서 황태후는 제도 밖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황태후란 황제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뒤집어 말하면 어머니가 황태후라는 것은 그녀의 아들인 경신대왕이 재위시 황제적 칭호와 위상을 지녔던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신라 하대에는 국왕을 대왕 칭호와 함께, ‘개선사석등기’에 경문왕의 처를 문의황후,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제44대 민애왕의 처를 ‘무용황후’와 제48대 경문왕의 처를 ‘문자황후’라고 하였듯이, 국왕의 정처를 황후로 호칭한 기록이 보인다. 황후라는 것은 그녀가 황제의 정처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정실 아내는 (왕)후라 하고 그 외의 여자는 비(妃)라 하였고, 제후의 정실 아내는 (왕)비라 하고 그 외의 여자는 빈(嬪)이라 하였다. 신라 국왕의 배우자를 왕후라 한 경우는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