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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대항면편(63)

편집국 기자 입력 2006.07.06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63)


▣ 대항면편


 


▷공자님을 흠모하는 선비의 마을 공자동(孔子洞)


  대항면 소재지로부터 바람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10여분을 달리고 바람재에서 또 구성으로 한참을 곤두박질 친 후에야 구성면 상거리, 흥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성1리 공자동을 만날 수 있었다.


  주례천 또는 석상천등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천변에 소담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공자동 마을로 인해 일대 계곡을 통칭해 공자동계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대항면에 속한 공자동이었는데 1914년에 공자동과 인근의 사기점(버덕), 창평, 방하마을을 합하여 대성동으로 하고 1971년에 공자동과 사기점(이후 폐동)을 1동으로 하고 창평과 방하를 2동을 분동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1670년 경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등 세 선비가 의기투합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정진할 수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감탄을 하고는 식솔과 함께 정착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이 공자동(孔子洞)으로 된 것은 이들 선비가 평소 존경하던 성인 공자님의 이름을 따서 공자동 이라했다고 마을 노인회장 김옥윤(70세)씨와 마을주민 유은상(55세)씨가 이구동성으로전한다.


 




△공자동 마을앞 주례천변에 놓인 “孔子洞”표석


 


  또 일설에는 처음에 마을이름을 정할때 공자님의 제자인 안연(顔淵)을 기려서 안연대(顔淵臺)라고도 했다고도 하는데 실제로 마을 서남쪽의 석상천변 넓은 바위에 “顔淵臺”라 새겨져있고


 


  옛날 이곳에서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또 어떤 자료에는 1700년경 이 마을을 찾았던 윤영섭이란 선비가 마을이름을 공자동이라 붙였다고 하는데 확인 할 길은 없다.


  이 마을로부터 하천을 건너 상거리 백어마을로 들어가는 방면으로 가자면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섰는데 전설에 따르면 흉년이 드는 해에는 이 나무의 구멍에서 구렁이가 나와서 울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흉년이 드는 해에 구멍에서 구렁이가 나와 울었다고 전해지는 공자동 정자나무


 


▷강릉유씨 집성촌 창평(昌平)


  대성1리 공자동의 폐교된 직지초등학교 대성분교를 끼고 돌아 방아치 방면으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창평마을이 나오는데 다른 이름으로 참나무정으로도 불린다.


  이 마을은 인근 방아재 고개아래의 작은 부락인 방하와 함께 대성2리로 속하는데 조선시대까지는 창평은 김산군 대항면으로 속하고 방하는 황간현으로 속했었는데 1906년 방하가 대항면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공자동과 방하를 대성동으로 했다가 1971년 창평과 방하, 그 사이의 안터를 대성2동으로 분동하였다


  창평이라는 마을이름은 1750년 강릉유씨(江陵劉氏) 한 선비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강릉유씨 집성을 이루며 살았는데 마을이름을 정하면서 인근의 공자동 지명과 관련하여 노나라 공자님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曲阜)인근의 지명인 창평을 마을이름으로 했다고 마을이장 유판출(48세)씨가 전한다.


 


 




△덕대산 자락에 자리 잡은 창평 마을 원경


 


  이 마을은 구성면 흥평리 평전과 경계를 이루는 덕대산 서남쪽 계곡을 따라 펼쳐진 3개부락 즉 창평, 안터, 방하로 이루어져있는데 현재의 대항과 구성을 이어주는 새도로가 나기전까지는 안터로부터 다소 멀리 떨어져있는 방하마을로 해서 향천으로 가는 현재의 비포장도로가 유일한 통로였다고 하니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공자님을 흠모하며 선비의 길을 쫓았을 옛 선비의 지조가 느껴지는 듯 하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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