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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감천면편(마을이야기99)

편집자주 기자 입력 2007.04.19 00:00 수정 0000.00.00 00:00

  ▷도평1리(시영골)


  감천면사무소를 지나 도로변 좌우로 위치한 도평리는 원래 성주군 신곡면으로 속했다가 1906년 김산군으로 편입된이래 1914년 소용, 후평, 평산, 도촌과 조마면의 신평을 합하면서 도평(道村의 도(道)자와 신평(新平)의 평(平)자를 따서 도평동(道平洞)으로 하여 신설된 감천면 관할로 둔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 숫돌을 채석했다는 숫돌봉 아래 자리잡은 도평1리는 대대로 성주이씨 집성촌을 이루어왔는데 1573년 성주이씨 밀직공파(密直公派) 12대손 진사 이근동(李根東)이란 선비가 성주 수륜(修倫)에서 이거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앞 들판이 지대가 낮아 수시로 침수되어 큰 늪(沼)을 이루고 또 마을뒤 숫돌봉의 지세가 풍수지리로 볼때 용(龍)의 형세이며 숫돌봉에서 발원한 물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천정천(天井川)제방을 따라 감천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라 하여 늪소(沼)자와 용용(龍)자를 따서 소용(沼龍)이라했다고 전 마을이장이며 성주이씨 종친회 총무인 이병영(72세)씨가  전한다.


 












▲소용마을의 지명유지래가 된 마을앞 들판전경


 


  감천을 향해 용의 혀처럼 평야지를 가로질렀었다는 제방은 1970년대 경지정리과정에서 사라져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소용이라는 지명도 세월의 흐름속에 변음이되어 이제는 시영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병자호란시 의병을 모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언의(李彦儀. 1600-1637)장군을 배출한 충절의 마을로서 마을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특히 마을뒷산인 숫돌봉의 끝단에는 의마총(義馬塚)으로 불리는 말무덤과 그 말을 기리는 의마비(義馬碑)가 웅장하게 서있는 것이 특이했다.


  감천면 새마을지도자회장과 성주이씨종친회장을 역임한 이원준(82세)씨에 따르면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이언의 공(公)은 의병을 모아 적에 대적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경기도 쌍령(雙嶺)전투에서 전사한 용장이었다는 것.


  그로부터 수일 후 마을뒷산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장군이 타던  말이 피묻은 갑옷을 물고 쓰러져있었고 울기만할뿐 먹지도않고 3일만에 죽으니 후손들이 주인을 끝까지 섬긴 의로운 말의 죽음을 기리기위해 말이 쓰러져있던 자리에 말을 묻어주고 의마총(義馬塚)이라 이름하고 뒤에 의마비를 세웠다고 한다.


 












▲성산이씨종친회장 이원준씨가 의마총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주고 있다


 


  끝내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후손들은 의마가 물고 온 피묻은 장군의 갑옷을 의마총 맞은편에 묻고 의관장(衣冠葬)으로 대신했다.


  나라에서는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후손들은 장군의 묘소아래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실을 세워 입향조인 진사 이근동 공과 공의 아드님인 충장공 이언의 강군의 위폐를 모셨다.


  나라가 위난을 당하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이언의 장군은 만고의 충신이요, 이 고장의 자랑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목숨을 걸고 수천리길을 달려 주인의 장렬한 죽음을 고향에 전한 의마의 충절도 더없이 거룩하고 아름답다.


  또 의로운 말의 갸륵함을 기려 무덤과 비를 세우고 수백년간 한결같이 벌초하며 가꾸어온 후손들의 마음씨 또한 예사롭지 아니하다.


  이른 봄날 따스한 햇살속을 받으며 의마총이 장군의 묘소를 향해 오늘도 서있다.


 


                                  <글/김천문화원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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