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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102)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5.10 00:00 수정 0000.00.00 00:00

감천면편

  ▷광기2리(둥디, 뒷골, 내동)


 


   면소재지인 기동, 더푸리마을에서 도골재로 불리는 고개를 넘으면 둥디,내동,뒷골등으로 불리는 광기2리가 골깊이 들어앉아있다.


  이들 마을은 원래 성주목 신곡면에 속했던 둥당,광암,내동의 3개부락이었는데 1906년 김산군으로 이속되고 1914년 인근의 일부부락들과 함께 광기동으로 고쳐 신설된 감천면으로 속했고 1949년 광기2동으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농소면 봉곡과의 경계를 이루는 대밭골뒷산으로 부터 발원한 새들내가 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감천으로 합류되고 금송리와는 매봉산이 가로막고 있다.


  여러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해있는 마을이다 보니 교통이 불편해 일찍이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고개가 발달했는데 대방방면의 매봉재, 무안리 대동과의 성주넘이재 ,도평리와의 갈말재, 등이 그것이다.


 


  일설에는  마을입구가 좁고 골이깊어  입구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아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때 피닌처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전한다.


  등당(登堂)마을은 1590년대말 인천이씨 이송(李松)이라는 분이 임진왜란때 피난을 와서 정착해 대대로 인천이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고 또 김해김씨 김종성(金鍾聲)이라는 분이1800년대 중반 조마 도암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김해김씨집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등당이라는 마을지명은 산을 올라와 집을 지었다하여 오를등(登)자에 집당(堂)자를 써서 등당(登堂)이라 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마을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주변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형세가 등잔(燈盞)처럼 오목하게 생겼다하여 등잔등(燈)자를 써서 등당(燈堂)이라했다고도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마을 안쪽의 내동과 구별짓기 위해 큰마을로 불린다.


  내동은 1860년경 밀양박씨 박세응(朴世應)이라는 분이 한양에서 이주해  본동내인 등당의 안쪽에 살았다하여 내동(內洞)으로 했다고하는데 지금은 큰동네와 붙어 경계가 없어졌다.


 


  등당과 내동사이에는 인천이씨문중 재실인 영정재(永正齋)가 높이솟아 이 마을이 인천이씨 집성촌임을 알려주고 있다.


  야산을 넘어서면 본동인 등당마을뒤에 마을이 있다하여 뒷골로 불리기도하고  마을입구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어 넓을광(廣)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광암(廣岩)이라 했다는 마을이 있는데 당초 마을입구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어 넓을광(廣)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광암(廣岩)이라 했다가 나중에 빛광(光)자의 광암(光岩)으로 바뀌었다.












▲ △광암마을의 지명유래가 된 도로변의 바위를 마을주민 이춘성씨와 이병선씨가 안내하고 있다.


 


  진입로공사로 바위의 상당부분이 갈려나가 본 모습은 적잖이 훼손되었으나 아직도 집 채 만한 바위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들 마을에도 풍수지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농소와 경계를 이루는 대밭골 뒷산으로부터 내동과 광암을 가로지르는 야산의 산세는 예로부터 학이 목을 길게 뻗치고 알을 품고 있는 명당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내동마을 뒤에 알처럼 생긴 봉긋한 동산이 있어 마냥 신기하기만하다.












▲  △마을주민 김용근씨가 학이 알을 품고있는 형국에 마을이 들어선 내력을 설명하며 대밭골 뒷산을 가리키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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