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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103)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5.17 00:00 수정 0000.00.00 00:00

감천면편

 ▷광기3리(전동,배다리)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고가대면(古加大面)에 속했던 전동은 1914년 인근의 성주목 신곡면의 등당, 광암, 내동, 배다리와 함께 감천면 관할로 되면서 광기동이 되고 1949년 배다리와 함께 광기3동으로 분동 된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동은 김산군과 성주목의 경계를 이룬 마을로 1914년 감천면사무소와 지서가 설치되어 면소재지 역할을 했는데 1938년 기동(基洞)으로 면사무소와 지서가 이전되었다.
전동이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밭이 많아 밭전(田)자의 전동(田洞)이라 했다고 마을이장 최병영(65세)씨가 전한다.












△마을이장 최병용씨가 일제시대 감천면사무소 터를 가리키고 있다.


 


  향지(鄕誌)에 따르면 이 마을앞에는 조선시대에 건천원(乾川院)이라고 하는 관용숙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광기2동 대밭골뒷산에서 발원해 감천으로 합류하는 소하천인 새들내를 다른 이름으로 건천(乾川)이라 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전동과 배다리 사이의 하천변에 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변의 배다리는 지금은 마을이라고 할 수 없을 만치 몇 가구만이 남아 명맥만 잇고 있는데 감천변 모래위에 집을 지었다하여 모래사(沙)자를 써서 사촌(沙村)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신곡면에 속했다가 전동과 함께 1914년 감천면  광기동으로 이관된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조마면 방면으로 갈 때 배를 타고 감천을 건너기도하고 또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이곳까지 들어왔다 하여 배다리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전한다.


 


  ▷금송1리(원동,대방)


  조선시대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했던 원동과 대방리는 1914년 감천면 금송리로 되었다가 1949년 금송1동으로 분동했다.


  원동과 대방은 1600년대초 벽진이씨(碧珍李氏) 평정공파(平靖公派) 20세손인 수군절제사를 지낸 이홍명(李弘明)이 낙향한 이래 대대로 벽진이씨 집성촌을 이루었고 뒤에 대덕 중상에서 연안이씨(延安李氏) 주부공파(主簿公派) 일가가 이주해 정착했다.


  원동마을중앙에는 입향조 홍명공이 자신을 호(號)를 따서 세운 사미정(四美亭)이 고풍스럽게 앉아 이 마을이 벽진이씨 집성촌임을 상징하고 있다.


  원동이라는 지명은 1648년(인조26년) 경렴서원(景濂書院)이 마을앞에 세워진 후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원동(院洞)이라 했다고 전한다.












△원동마을의 지명유래가 된 경렴서원터를 새마을지도자 이정효씨가 안내하고 있다.


    경렴서원은 당시 김산군수 조송년(趙松年)이 세우고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이약동(李約東)을 제향했다가 1673년 (현종14년)에 인근 이화리로 옮겼고 1658년(영조38년) 김산군수 윤담(尹淡)이 자산기슭에 이전했다고 하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때 훼철된후 복원되지 못했다.


  이같은 잦은 서원의 이전은 이들 마을이 감천변에 인접한 관계로 잦은 침수가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원동마을과는 삼막골을 사이로 조금 떨어져있는 대방(大芳)은 성황대이 고개를 경계로 농소 용암리 대방과 이웃하고 있는데 지명마저 두 마을이 서로 같아 의아했는데 농소대방이 마을앞에서 시작된 제방이 길게 월곡천으로 이어져있어 큰 제방이라는 뜻의 대방(大防), 또는 큰 마을이란 뜻의 대방(大坊)이라면 이 마을은 향기방(芳)자의 대방(大芳)으로 옛날 인근 이화리(梨花里)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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