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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부항면편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6.14 00:00 수정 0000.00.00 00:00

 

▷지좌리(한송정)


 유촌리를 지나 지방도변 좌측으로 대덕면 조룡리와 경계를 이루는 언두봉 아래 부항천변에 위치한 지좌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한 상지리(上智里),하지리(下智里)였는데 1895년 서면에서 분면해 하서면으로 잠시 속했다가 1915년 두 마을을 합해서 지좌리(智佐里)로 하고 신설된 부항면으로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대대로 벽진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벽진이씨 시조로부터 11세로 고려 충숙왕대에 중문대장군(中門大將軍)을 역임한 이성간(李成幹)이라는 분이 성주에서 부항으로 이거한 이래 대대로 벽진이씨집성촌을 이루어 오고있다.


 


 이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낙향한 전서공(典書公) 두은(杜隱) 이존인(李存仁 1344-?) 선생이 인근 사등리 단산으로 낙향해 살면서 후학을 양성해 이 마을이 지례현의 반촌으로 문향을 떨쳤다.


 


 이후 전서공의 후예로 선조때 공조참의를 지낸 21세 경암(鏡巖)이자흥(李自興)선생이 1573년 벽진이씨,연안이씨,서산정씨,이천서씨,순천박씨등 5개성씨, 12개문중의 문인 16명으로 십육현회를 조직하고 그 증표로써 한송정(寒松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 정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명소가 되었는지라 마을이름조차 한송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의병장 여대로(呂大老)선생은 문집에서 “한송정은 이자흥(李自興), 朴慶淳(박경순), 鄭士鎔(정사용)등 16인이 정자를 짓고 학문을 권장했으며 여름에도 겨울같이 시원하다” 라고 적고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10일에 16현에 대한 제사를 한송정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원래 마을앞 부항천변의 소나무숲에 있었던 이 정자는 1936년 병자년 수해때 유실되었다가 인근밭에서 정자현판이 우연이 발견되어 1961년 마을안쪽에 다시 세웠다.













△유실된후 다시 세워진 한송정을 마을주민 이형화(67세)씨가 안내하고있다.




 각종 향지에 나타난 한송정의 면모를 살펴보면 2층 건물로 높이가 30자, 폭이 45자로 요즘평수로 환산하면 28평정도 된 것으로 보이며 기둥이 싸리나무였으며 추녀의 사면에 풍경을 달았다고 한다.


한송정인근 부항천변에는 용두암,경암대등 빼어난 절경이 많고 마을을 우회하는 지방도가 개설되기전까지 한송정이 삼도봉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났다고 하는데 지금은 옛 정자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외로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한송정터를 지키는 표석





 그 옆에는 병자년수해때 용케 화를 면한 효자 이영보(李英普 1768-1821)의 정려각이 섰는데 선생은 13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정성으로 예를 다하고 연이어 모친이 득병하자 7년간 성심봉양했는데 어느날 모친이 자라고기를 먹고싶다고 하자 엄동설한에 부항천을 다니며 대성통곡을 하자 얼음이 깨지며 자라가 튀어올랐다는 이야기가전해지는 효자로 1858년 정려가 내렸다.












△옛 한송정자리 옆에 세워진 효자 이영보정려각


 이영보의 효행은 19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했는데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라 하여 지좌리가 효아촌(孝兒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항댐건설로 마을전체가 수몰될 예정인 지좌리는 일심서당과 황계정사건물은 이미해체되어 대구한의대로 기증된 상태였으며 정려각의 정판도 옮겨진 상태였는데 지역학문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한송정만이라도 이전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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