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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부항면편(2)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6.28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109)




부항면편




▷사등2리(사드래,윗사드래,장자동,한적동)


 


 부항면소재지인 사등2리는 부항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장자동과 맞은편의 한적동, 면사무소등 관공서가 소재해있는 윗사드래와 사드래등 4개의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과 상서면에 속한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이었다가 1914년 이웃한 단산과 합해 사등리로 개칭하여 부항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사드래,장자동,한적동이 사등2리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9년 유촌리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전해오면서 면소재지가 된 사드래는 사등이라는 행정동명의 유래가 된 마을로 부항천이 마을앞에서 굽이쳐 흐르면서 모래밭이 형성돼 모래들,사들,사드래라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모래사(沙)자에 무리등(等)자를 써서 사등이라 했다고 한다.


 


 또 월곡리를 거쳐 내려온 부항천이 이 마을앞에서 반달(半月)모양으로 흐른다하여 달리 사월(沙月)이라 했다고도 전하는데 지금은 사드래와 윗사드래로 통칭되고 있다.














△활인산아래 자리잡은 사드래마을전경. 마을 이장 이관영씨가 사드래마을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드래는 1468년 문과에 급제한 뒤 현감과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한 이숙황(李淑璜)선생이 말년에 머룰며 후학을 양성하면서부터 연안이씨 현감공파와 감찰공파의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뒤에는 활인산(活人山)으로 불리는 큰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이 산과 부항천을 사이로 마주보고 있는 문필봉(文筆峰)이라는 산이 예사롭지 않다.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에 예외없이 먹을 찍은 붓끝을 닮았다는 문필봉이 마을앞을 지킨 예가 많음을 볼 때 조선조 초기 이숙황 선생 문하에서 무수한 인재들이 배출된 요람지가 이곳 사드래 마을이며 연안이씨 문중에서 세웠다는 서당 월파제(月波齊)에서 공부하던 학동들이 문필봉을 바라보며 등용문(登龍門)에 오르는 꿈을 꾸었으리라.


 


 사드래입구의 부항지서 안쪽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망루대가 잡풀속에 홀로 서있는데 1950년 9월부터 51년12월까지 삼도봉과 덕유산 등지에 은거하고 있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군사적요충지인 이곳 부항일대를 차지하기위해 수시로 부항지서를 공격하면서 지역청년단원들과 많은 교전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천시사」에는 정복을 착용한 경관이 늠름하게 망루대를 지키는 흑백사진 한장이 실려있어 지붕을 비롯한 상부가 사라진 지금의 망루대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부항지서의 옛 망루대. 지역민들은 격전의 현장인 망루대가 하루속히 복원되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윗사드래 마을앞 부항천에는 배정소(裵鄭沼)라 불리는 큰 웅덩이가 있는데 옛날 배씨와 정씨성을 가진 선비들이 이곳바위에 올라앉아 노닐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혀진 이름으로 수해때 주변이 적잖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기암괴석과 어울어진 부항천의 절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부항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사드래마을 아래쪽에 장자동과 한적동이 하천을 사이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장자동은 옛날 이 마을에 연안이씨 문중의 장남(長男)이 분가하여 큰 재산을 모으고 주위에 덕을 베풀고 살았다하여 장자동(長子洞)이라 했다하고 맞은편에 떡시루처럼 생긴 시루봉 아래에 자리잡은 한적동은 마을앞은 부항천, 뒤로는 비봉산과 문필봉이 가로막고 있어 사람의 왕래가 없이 조용하다하여 한적하다는 뜻의 한적동(閑寂洞)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시루봉아래 자리잡은 한적동 마을전경. 밖에서는 마을이 잘 보이지 않지만 칠불사라는 사찰이 자리잡은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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