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110)
부항면편
▷월곡리(월곡,학동,몽구동)
면소재지인 사드래마을을 지나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부항천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월곡리가 자리잡고있다.
월곡은 조선시대초까지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으로 불렸는데 조선말 지례현 서면으로 잠시 속했다가 1895년 월곡(月谷),학동(鶴洞),구룡동(九龍洞)으로 개칭해 지례현 상서면 관할로 했다가 1914년 3개 마을을 월곡리로 통합해 부항면으로 편입시켰다.
월곡마을 서북쪽에 있던 구룡동은 1936년 병자년 수해때 수몰되어 폐동이 되고 현재는 본동인 월곡과 맞은편의 몽구동, 어전방면의 학동 등 3개마을이 월곡리로 속하며 남평문씨,안동김씨,밀양박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부항초등학교가 위치해있는 큰 마을인 월곡리는 부항천변에 위치해있으며 마을에 거북이가 달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형상이라하여 거북바위 또는 거빵굴이라 불리는 큰바위가 있어 달이실이라 부르고 한자로 달월(月)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월곡(月谷)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월곡마을의 수호신인 거북바위의 머리부분.앉아있는 사람은 마을이장 김상한씨
실제로 도로변에 거북이가 머리를 쳐들고있는 형상의 큰 바위가 도로변에 튀어나와 있는데 1970년대 도로를 새로 내면서 몸통에 해당하는 대부분이 묻히고 말았다는 것.
마을이장 김상한(69세)씨에 따르면 어릴때 도로보다 훨씬 높았던 이 바위위에 흙을 뿌리고 미끄럼틀로 이용했다고하며 거북이가 낳은 알로 전해지는 동그란 바위가 하천에 있기도했다.
이 거북바위는 수년전 다리공사를 하면서 콘크리트속으로 사라져버릴위기에 쳐하기도 했는데 마을의 수호신을 지켜야한다는 어르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일부라도 살릴 수 었다고 한다.
거북바위 뒤쪽 언덕에는 약목댁(若木宅)으로 불리는 온전한 형태의 고택이 우뚝서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구조인 문간채, 사랑채, 안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 무풍에서 1919년 이전해 다시 세웠다고 전하며 문재용씨의 모친 고향인 약목을 따서 약목댁이라는 택호를 얻었다고 한다.
마을뒷산의 형상이 풍수적으로 볼때 청룡의 지세이며 하대리로 가는 마을끝 모퉁이부분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길지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특히 약목댁의 집터는 거북바위가 집을 업고 물가로 향하는 지세에 해당되고 보니 단연 명당터로 꼽힌다.
옛날 약목댁에 어느 스님이 돈을 맡긴 후 찾으러 오지않아 스님의 돈을 불려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또 월곡마을은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25세 되던 해인 1900년 이 마을에 살았던 일주(一舟) 성태영(成泰英)의 집에 한달간 묵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지례군 천곡(川谷.月谷으로 추정)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산에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고기를 보는 취미로 소일하거나 옛글을 문답하며 어언 한달을 보냈다” 라고 월곡에서의 한달을 회고했다.
기품있는 선비이며 대부호였다고만 전해지는 성태영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련자료가 없어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으나 겨레의 등불인 백범선생이 우리고장에서 한달간을 머물며 청운의 꿈을 키우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마을안쪽 뒷산아래에는 몽구동(夢龜洞)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옛날 한 선비가 이곳에 들렀다가 거북이꿈을 꾼후 길지로 여겨 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꿈몽(夢)자에 거북구(龜)자를 써서 몽구동이라 했다고 하며 어전 방면의 학동은 마을 뒷산이 학을 닮았다하여 학동(鶴洞)이라했다고 전해진다.
학동마을앞에는 수풍정(水風亭)이라 불리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는데 예부터 이 나무에 난 구멍에 고인물이 속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은 명소였다고 하는데 10여년전 벼락을 맞아 3가지 중 2가지가 부러지고 한가지만이 서럽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