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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애 김천시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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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애 김천시지회장
“6월 호국보훈의 달이 지나면...”
지금은 7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매년 그렇듯 호국보훈의 달이 지나면 언제 그렇게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하다.
이렇듯 요즘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6.25란 6월 달이면 가지는 행사로 끝이난다. 하지만 권영애(78세) 씨에게는 그렇지 않다.
“6.25 전쟁이 남편을 빼앗아 간 것이 내 나이 스물셋 이었어. 3째 아이를 등에 업고 동네를 서성이다 이웃 아저씨가 전해준 편지 한통에 하늘이 내려 않았지. 그 날이1953년 4월 20일이었어. 내 평생 잊혀지지 않을 숫자지. 그렇게 우리 아저씨는 사망통지서 한 장만을 남기고 가족 곁을 떠났지.”
젊은 나이에 혼자돼 아녀자의 몸으로 세 아이를 키우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임종이 언제일지 모를 만큼 아픈 시어머니와 때를 맞춰 홍역을 하는 두아들 덕분에 권영애씨는 남편의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원호계(현재 보건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곳)에서 연락이 왔었어. 남편의 유골을 찾았다고 하지만 두 아이와 시어머니의 목숨이 간당간당 하는 시점에서 죽은 사람의 유골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였지. 아이들이 정상을 찾고 난 다음에야 남편의 유골이 생각날 만큼 어려운 시대였어.”
물론 그 어려움은 비단 권영애씨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 시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렇게 생과 사의 길에 서 있었다.
“젊은 시절 정말 힘이 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원금도 나오고 혜택도 많아져서 정말 살기 좋아졌지.”
하지만 6월 보훈의 달이 지나고 나면 더욱 허무함이 밀려온다.
“매년 반짝 지나가는 관심일 뿐이야. 물론 57년이나 지난 현 시점에서 현실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인 만큼 후손들이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6.25를 겪은 당사자인 우리가 살아 있는 지금도 이런데 우리가 가고나면 어떤 상황일지는 보지않아도 뻔해”라고 말하는 권영애씨의 얼굴에는 쓴 웃음이 멤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