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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115)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8.16 00:00 수정 0000.00.00 00:00

부항면편

 

▷대야1리(갈불,홍심동)


하대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오다 오징어를 닮았다하여 이름붙혀진 수리미재를 넘으면 구남천변에 파천리와 이웃하고있는 대야1리 갈불마을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으로 속해 갈평(葛坪)으로 불렸는데 1895년 서면이 상하로 나뉘면서 하서면이되고 1914년에 하서면의 임곡일부와 홍심동, 상서면의 대야를 합해 대야리라하고 신설된 부항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에 갈불을 대야1리로 분동하고 홍심동은 폐동되었다.


갈불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예부터 이 마을 주변산에 칡이 많아 칡 갈(葛)자에 평평할 평(坪)자를 써서 갈평(葛坪)이라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평”이 “불”로 변해 갈불로 불리게 되었다.


또 행정동명인 대야(大也)라는 지명은 원래지명은 천지리(天地里)였는데 나라에서 임금이 살지않는 서민촌으로서 마을이름을 천지로 하는것은 있을 수 없다하여 하늘천(天)자에서 한일(一)을 빼어 큰대(大)자로 고치고 땅지(地)자에서 흙토(土)자를 빼서 어조사야(也)자로 고쳐 대야리(大也里)로 했다고 전한다.


갈불마을은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 김문기(金文起)선생의 5세손인 김언희(金彦希)라는 분이 응명동 독정(督井)마을에서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김녕김씨 충의공파 집성촌을 이루어왔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을중앙에는 갈산재(葛山齋)로 불리는 문중재실이 우뚝 솟아있다.














홍심동 이용직판서의 저택을 허물어 지었다는 김녕김씨 문중 재실인 갈산재
홍심동 이용직판서의 저택을 허물어 지었다는 김녕김씨 문중 재실인 갈산재






또 이 마을은 딱박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닥나무가 많아 질좋은 한지의 생산지로 유명했는데 마을노인회장 김명규(77세)씨는 일제시대말까지도 마을앞 구남천변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닥나무를 삶고 한지를 만들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갈불마을로부터 대야2리 대동으로 가다가 좌측산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다보면 한말(韓末) 갑자기 마을이 생겼다가 또 갑자기 폐동이 되어버린 홍심동 마을터가 골깊이 들어앉아있다.












▲ 한지를 생산하던 마을앞 구남천



홍심(紅心)이라는 것은 과녁의 붉은 중앙을 뜻하는 것으로 한말 이곳에 은거한 이용직(李容直.1824-?)이 파직당한 설움을 곱씹으며 한을 담아 붙인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용직은 흥선대원군의 인척으로 대사헌, 공조판서, 경상도관찰사등 요직을 두루거친  당대의 실력가로 위세가 대단했다고 전하는데 경상도 관찰사 재직시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파직당한후 세상에 쫓기듯 궁벽진 이곳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근신해야할 이용직은 이에 아랑곳 하지않고 호화저택을 짓고 집앞에 연못을 파 뱃놀이까지 했으며 심지어 인근동의 부녀자까지 희롱하는등 갖은 패악을 저질러 많은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 이용직판서의 집터전경


다만 김천을 중심으로 단발령에 항의해 일어났던 1896년의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의 의병장 이기찬(李起燦. 1853-1908)선생이 남긴『지산유고(止山遺稿)』에는 <丙申年 三月 初五日에 삼도봉아래 홍심동으로 들어가 이용직公의 산장에 나아갔다.


온갖 콩과 쌀이 쌓여있는것을 보고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80석의 쌀을 내주었는데 지극히 큰 손이었다>라고 하여  이용직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주목된다.   


옛 호화로웠던 저택은 사라지고 지금은 주춧돌과 연못터만이 남아있을 따름인데 수년전 홍심동으로 들어와 농장을 경영하는 주민 황명호(55세)씨를 통해 개략적인 홍심동의 내력을 들을수있었던것이 그나마 대행이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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