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116)
부항면편
▷금광촌으로 이름났던 대야2리(대야동)
대야1리 갈불마을에서 한참을 더 올라가다보면 삼도봉 자락인 밀목령 아래로 대야,대동으로 불리는 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했었는데 1895년 상면으로 되었다가 1914년 인근의 신촌을 합해 신설된 부항면으로 속한후 1963년 대야2리로 분동되었다.
삼도봉으로부터 동쪽자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 마을서쪽의 밀목령을 넘으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파천리, 남으로는 해인리, 북으로는 질매재로 연결된다.
대야동은 다른이름으로 대동(大洞)으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일제시대까지 이어진 이 마을 금광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까지 마을뒷골일대에서 금맥이 발견되어 큰 규모의 금광이 개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는 것.
남산동에 있는 과하천의 옛이름인 금지천(金之泉)이라는 금광에서 유래가 된 김천(金泉)이라는 이 고장의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천은 신라시대부터 금의 주요산지로 알려졌는데 금광이 밀집된 이 마을에 와서야 그 사실을 실감 할 수 있었다.
△대야마을의 금광입구
실제로 각종 고문헌에 김천은 선산과 함께 신라시대부터 이름난 금생산지로 기록되어있다.
현재도 대량, 금릉, 대야로 이름 붙혀진 3곳의 금광굴의 형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는 인근에 들어선 식당에서 저장고로 활용하면서 원형이 보존되고 있었다.
굴입구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찬바람이 쉴세없이 불어오는데 이같은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금광굴의 깊이에 대해서 어떤이는 멀리 해인동앞에까지 뻗었다는등 여러설이 있는데 어릴때 동굴의 끝까지 들어갔었다는 전 마을노인회장 임차랑씨에 의하면 수평과 수직갱도를 합해도 백미터는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일제시대 많은 금이 생산되면서 이 마을에는 일본인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밀려들어와 크게 번성했다는데 자연 인부들을 상대하는 술집까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수시로 분쟁이 발생되자 급기야 일개 마을에 지서가 들어서기도 했다고.
△옛 지서가 있었던 터를 마을주민이 가리키고 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의 김상호씨 주택자리에 있었다는 지서에서는 금광에서 말썽을 피운 인사들을 잡아다가 문초를 하느라고 수시로 사람 때리는 소리가 들렸었다고 한다.
대동(大洞)이라는 지명은 금광의 개발과 함께 마을이 번성할 때 붙혀진 지명으로 보이며 일확천금을 꿈꾸며 산간오지로 몰려들었을 옛 금광에는 이제 무더위를 피해 찾아든 피서객들로 또다시 붐비고 있다.
한참을 동굴앞애서서 더위를 식힌후 마을을 돌아보고 내려서자니 동구밖에 좀처럼 보기드문 전나무 고목이 버티고 섰는데 20여년전 벼락이 내리쳐 상단부가 절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위용만큼은 필시 예사롭지 않다.
△대야동 마을앞의 고목 전나무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