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20)
부항면편(마지막회)
▷희곡리(가마고개,안희실,앳골,숫골)
유촌리에서 두산,파천리 방향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다가 희곡1리로 속하는 앳골과 숫골, 희곡2리의 가마고개와 안희실마을을 만날 수 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서면에 속해 교현리(轎峴里),외희,중희,내희동으로 불렸는데 1895년 서면이 상하면으로 분면되면서 하서면으로 되고 1914년 부항면이 신설되면서 4개마을을 합해 희곡리로 했다가 1963년 가마고개와 안희실을 희곡1리로,앳골과 숫골을 희곡2리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있다.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초 청백리로 유명한 이약동(李約東)선생의 부친인 해남현감 이덕손(李德孫)이 안희실로 이거한 후 대대로 벽진이씨 전서공파 집성촌을 이루고있다.
희곡(希谷)이라는 지명은 벽진이씨 문중의 한 선비가 인희현(人希賢), 현희성(賢希聖), 성희천(聖希天) 즉 현인을 따르고 성인을 쫓으며 하늘을 따른다는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뜻을 세우고 인근마을을 삼희(三希)로 나누어 숫골을 외희(外希 ),앳골을 중희(中希),안희실을 내희(內希)로 칭했다는 것에 기인해 희곡(希谷)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가마고개마을은 한자로 가마교(轎)자와 고개현(峴)자를 써서 교현(轎峴)이라했는데 마을뒤 안희실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 가마고개가 마을지명으로 굳어진 경우이다.
△가마고개마을의 지명유래가된 가마고개전경
이 마을은 마을입구에 신랑을 상징한다는 사모바위가 있고 마을뒤 가마고개아래의 이종연(77세)씨 집 옆에 신부를 상징하는 족두리바위가 있으며 지금은 사라졌지만 마을중앙에 가마모양을 한 가마바위가 실제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가마고개라는 지명과 이들 바위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개마루의 벽진이씨 문중 재실인 사일재(事一齋)에는 부친이 병석에 눕자 100일 기도 끝에 산삼을 구해 완치시켰다는 행초(杏樵) 이우연(李愚淵 1801-1873)선생의 효자비가 서있다.
△사일재와 행초선생 효행비
가마고개를 넘어서면 99개의 작은 골짜기가 있다하여 큰골이라 불린다는 안희실(內室)마을이 자리잡고있다.
가마고개 바깥으로 있는 앳골과 숫골은 희곡2리로 속하는데 조선시대까지 앳골은 중희(中希) 또는 와야(瓦也)라 불렸는데 이것은 희곡중에서도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하여 중희, 또 마을 중앙에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어 기와와(瓦)자를 써서 와야라 한 것이 앳골,와야골등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주민 이순영(85세)씨가 옛 기와를 굽던 가마터를 가리키고있다.
앳골과 산하나를 사이로 마주하고있는 숫골은 목숨수(壽)자를써서 수동(壽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 마을 출신으로 병자호란때 의병을 모아 상경하다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두문불출했다는 이언국(李彦國 .1614-1703)선생이 90세까지 살며 장수했다하여 수동이라 했다고 전한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