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22)
지례면편
▷교리(校里)
면사무소와 관공서가 운집한 지례면소재지인 교리는 향지(鄕誌)에 신라 진흥왕때는 지품천현, 경덕왕때 지례현을 두었고 고려 경덕왕때 감무(監務)를 파견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하현면에 속했는데 조선 세종 8년인 1426년에 이 마을에 향교(鄕校)가 세워지면서부터 교동(校洞), 교촌(校村), 향교마등으로 불렸고 1914년 인근 범밧골(富坪洞)을 합하여 교리라 고쳤다가 1971년 교1리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례는 예로부터 가야, 백제, 신라가 국경을 접한 군사적요충지이자 전라도와 경상남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일찍이 중앙 정부로부터 주목을 받왔고 문물의 집산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구도로를 중심으로 향교맞은편 일대를 일컬어 장터로 불린바 이는 교리가 오래전부터 지례, 부항, 구성, 증산, 대덕 상권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지례장이 섰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을회관 일대에는 큰 장이 섰던 공터와 점포의 흔적이 옛 정취를 머금은 채 흔적으로 남아있다.
▲ 옛 지례장터 전경.마을이장 이영남(56세)씨가 안내를 하고 있다.
지금의 지례면사무소와 초등학교, 지서일대가 옛 지례현 관아와 객사등이 밀집해있고 또 상권의 중심인 장터가 소재한 교리를 수해로부터 보호하기위해 현감 이채(李采)는 지례방천을 축조할 때 상부리와 교리 중간에 보조역할을 하는 세뚝이라는 제방을 추가로 쌓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 이채현감이 장터 일대를 보호하기위해 축조한 보조제방인 세뚝
기록에 따르면 지례면사무소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지례현 관아에는 동헌을 수경당(垂慶堂)이라 했고 현감밑에 좌수1인, 별감2인,군관 30인, 인리 38인, 지인20인, 사령19인, 관노20인, 관비25인이 있었다고 한다.
장터맞은편의 주악산자락에는 유서깊은 지례향교가 자리잡고 있는데 세종8년인 1426년에 정옹(鄭雍) 현감 재임시에 창건되고 성종16년인 1485년에 김수문 현감 때 명륜당을 중건하고 영조50년(1774년)에 사반루(思泮樓)가 세워졌다고 한다.
지례향교는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이 되었는데 이때 공자를 비롯한 다섯 성현의 위패를 구해낸 호성위도(護聖衛道)의 공적을 두고 의성김씨와 은진송씨 집안에서 분쟁도 있었으나 절대절명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당시의 절대가치관인 유교의 도를 다하기위해 불길을 마다하지않고 뛰어들었던 두 사람의 행동은 칭송받아 마땅할것이다.
▲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사연이 스며있는 윤은보, 서즐 선생정려각과 유허비
또 지례현의 깊은 역사만큼이나 이름난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던지고 지례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한 장지도(張志道)선생과 후손이 없는 스승을 지극효성으로 섬긴 제자 윤은보(尹殷保)와 서즐이 그중 으뜸이다.
특히 서즐선생은 스승의 기일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물을 구하지못해 통곡하자 효성에 탄복한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는 정성고개의 주인공으로 마을 입구에는 우리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인 윤은보서즐정려각과 세분의 유허비가 나란히 서서 지례가 유서깊은 충효의 고장임을 묵묵히 대변해 주고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