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25)
지례면편
▷관덕리(활람,구시골)
지례면소재지로부터 국도3호선을 따라 대덕방면으로 가다가 송천,신평마을을 지나 좌측으로 천상봉아래 자리잡은 관덕리는 활람,새터,원당,구수골,고석,양산 등 6개 마을이 산재해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상현면으로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일대 마을을 합해 관덕리라 했는데 활람과 구수골이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새터,원당과 함께 통상 관덕1리로 속하는 활람마을은 궁을산아래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 중종때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역임한 김희수(金羲壽)라고하는 분이 사림파와 훈구파의 충돌로 빚어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후 활람으로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김해김씨 경안공파(敬安公派)집성촌을 형성해 오고있다.
활람이라고하는 지명은 김해김씨 입향조인 김희수공이 마을에 정착한 후 뒷산의 형세가 굽은 활을 닮았다하여 활궁(弓)자에 굽을 을(乙)자를 써서 궁을산(弓乙山)이라 했는데 뒤에 이 마을이 지례현 소재지로부터 남쪽에 있다하여 궁남(弓南)이라 적고 활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구전에 이 마을에서 활을 쏘면 이웃한 여배리 속시(束矢)까지 날아가 화살을 주워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를통해 관덕이라는 또 다른 지명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활쏘기 연습장인 관덕정(觀德亭)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겠다.
활람의 또다른 자랑은 마을옆 궁을산 정상에 자리잡고있는 숙명(淑明),숙경(淑敬)두 공주의 태실을 빼놓을 수 없는데 태실의 존재를 통해 이 마을이 왕실에서도 주목한 명당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태실은 왕손인 왕자와 공주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위해 전국의 명당에 태반을 모신 것으로 궁을산에는 조선17대 임금 효종(孝宗)의 3녀 숙명(淑明)공주와 6녀 숙경(淑敬)공주의 태를 공주의 오빠인 18대 임금 현종 즉위 원년인 1660년에 조성되었다.
△조선 17대 효종임금의 두 공주의 태를 안치한 궁을산 태봉전경
공주의 태실은 일제 강점기때인 1928년에 서삼릉으로 이안된 후 방치되어오다 1940년대 후반까지 태실비가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태를 안치했던 두 개의 구덩이만 산 정상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두 공주의 태실에 대한 특별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으나 1930년대초에 간행된 「교남지(嶠南誌)에 “弓乙者山 在郡南八里顯宗庚子藏淑明淑敬兩公主胎” 즉 “궁을자산은 군의 남쪽 8리에 있는데 현종 경자년(1660)에 숙명,숙경 두 공주의 태를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왕직전사출장복명서인 「태봉(胎封)」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淑明公主阿只氏胎室 順治十七年十月 日 / 淑敬公主阿只氏胎室 順治十七年十月 日
활람마을로부터 안쪽으로 증산면 황항리로 이어주는 천상봉 노루목재 아래 자리한 구시골 마을은 우리고장의 유일한 봉산이씨(鳳山李氏)집성촌으로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서 조선 고종때 이춘욱(李春旭)이란 선비가 이거한 이래 대대로 봉산이씨 집성을 이루어 오고있다.
구시골이란 지명은 마을일대의 아홉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해졌다하여 구수골(九水谷)이라 했다고 하는데 옛날 마을에 있는 구슬바위라는 큰 바위밑에 구슬이 들어있어 그 구슬을 꺼내려다 벼락이 쳐서 그냥 덮었다는 전설로 인해 구슬골이라 한 것이 음이 변해 구시골로 변했다고도 한다.
사진 설명 화면 왼쪽 기재
△김영태씨 집 마당에 놓인 구슬바위. 마을이장 이종철(43세)씨가 안내하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