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31)
조마면편
▷강곡2리 (강바대)
조마면소재지인 금단으로부터 성주방면 901호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강곡천변에 강곡2리 강바대마을이 자리잡고있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하여 강평(江坪)이라했고 1914년 이웃한 구곡(금단)마을과 합해 김천군 조마면 강곡동으로 고쳤다가 1948년 금릉군으로 이속되고 1962년 강곡2동으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동남쪽의 염속산과 남쪽의 매봉산사이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에 자리잡은 강평마을은 원래 한양조씨 일가들이 정착해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뒤에 진주강씨(晋州姜氏)찰방공파(察訪公派) 강이화(姜履和)라는 분이 1761년(영조37년) 구성 기를(耆老洞)에서 강바대로 이거한 이래 지금까지 진주강씨 집성촌을 형성해 오고있다.
강평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강곡천변의 들판이 예부터 기름지고 넓어 시내 강(江)자에 평평할 평(坪)자를 써서 강평(江坪)이라 했는데 강바대로 불리게 된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호은공(湖隱公)문집 등에 강해촌(江海村)이라고도 기록 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마을의 들이 바다처럼 넓다하여 강(江)자에 바다 해(海)자를 합해 강바다라 한 것이 강바대로 변음된 것으로 보고있다.
진주강씨의 김천입향은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14세손 강부(姜符)公의 손자 남와(南窩) 강설(姜渫 1583-1651)이 구성의 명문가이자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지례현감을 역임한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1552-1619)의 사위가 된 사연과 무관치 않다.
강설은 충남 회덕 태생으로 당시 영남 남인학파를 이끌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는 사람을 누되게 한다”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참여하다 1628년(인조6년) 처향(妻鄕)인 구성 기를로 낙향했다.
△강바대마을의 자랑인 자동서원 전경
특히 강설선생은 임란때 소실된 김산향교의 중건을 위해 헌신했는데 선친의 유훈을 받든 아들 여구, 여호 대에 이르러 향교의 면모를 일신해 김천의 흥학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들 부자의 문덕(文德)을 추앙하던 안동 병산서원장 이제를 비롯한 영남유림 555인의 발의로 1804년 마을에 서원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자동서원(紫東書院)이다.
진주강씨 28대손인 강덕규(前 초등학교장)씨는 이른 새벽 서원을 찾은 불청객을 따뜻이 맞이하며 진주강씨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 마을에는 유명한 두 개의 바위가 있는데 빗내바위와 메기바위가 그것으로 강곡천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다른 마을과 달리 수해를 입지 않는 이유가 마을주민들은 마을위 강곡천변에 버티고 있는 빗내바위 때문으로 믿고 있었다.
△수해로부터 마을을 수호하는 것으로 신봉되는 빗내바위
수직으로 내려오던 냇물이 마을앞을 가로막고 빗장처럼 튀어난 이 바위에 부딪혀 물살이 빗겨 흐르게 되어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현지를 답사해 본 필자의 눈에도 확연히 바위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어 보는 이 들로 하여금 자연의 조화에 탄복할 따름이다.
또 다른 바위인 메기바위는 마을입구에서 강곡천을 건너 산아래에 있는데 남녀가 교접을 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마을에서 신성시하며 기우제를 드려왔다고 전해진다. △다산과 풍년의 염원이 깃든 메기바위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