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33)
조마면편
▷장암2리 (새말)
장바우로부터 조마면소재지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장암교 직전에서 우측으로 바위절벽을 끼고 난 샛길을 따라 돌면 아랫새말, 가운뜸, 윗새말이라 불리는 장암2리 새말 마을이 나타난다.
멀리 구성면 바랫들과 도지미 마을이 감천 너머로 마주하고 성황재, 뒷골, 배암골, 새암골을 경계로 점동, 장바우와 나뉘어있는 새말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도암(道岩)으로 불렸는데 1914년 김천군 조마면 장암동으로 고치고 1962년 새말,웃새말, 아랫새말을 장암2동으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 판서공파 10세손인 김윤겸(金允謙)이 양천동하로에서 이거한 후 김해김씨와 연일정씨, 창녕성씨등이 집성을 이루어왔다.
또 지금은 모두 타처로 떠나고 없으나 조선시대말까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성종조로부터 연산조에 이르기까지 형제 정승으로 유명한 허종(許琮), 허침(許琛)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반촌(班村)으로 이름이 높았다.
두 정승의 생가터는 장암교에서 새말로 들어오는 대밭일대로 알려지고 있다.
△허종,허침 형제 정승의 생가터 일대
웃새말에는 이 마을출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임진왜란때 왜병에게 죽임을 당한 진사 정일(鄭鎰)과 투신자살한 부인 덕산윤씨 부부와 세 살난 주인의 아들을 키워 대(代)를 잇게 한 노비 막개(莫介)와 계화(戒花)부부를 삼강세가(三綱世家)라 하여 칭송하고 1707년(숙종33년)에 정려가 내렸다.
산비탈에 자리잡은 부부의 정려각은 번져 들어오는 잡목을 후손 정석용(82세)씨 홀로 감당하기가 힘겨운 듯 쓸쓸하게 감천을 굽어보고 섰다.
정려각 아래에는 주인을 목숨바쳐 섬겼던 막개와 계화 노비부부의 충노비(忠奴碑)가 망부석처럼 서있다.
▲정일부부 정려각과 후손 정석용씨
▷장암3리(예동,점동,사창)
새말과는 성황고개를 사이로 두고 이웃하고 있는 점동과 장바우,신안과 접해있는 예동, 사창마을이 장암3리로 속한다.
도로변의 예동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1936년 병자년 수해때 장바우에서 권씨일가들이 이주해 정착한 후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며 이웃한 사창은 옛날 곡식을 저장하며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구휼기관인 사창(社倉)이 있었다하여 사창이라는 동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가장 안쪽의 점동은 옛날부터 옹기를 굽던 옹기점(甕器店)이 있어 점동(店洞)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는데 마지막 옹기장이인 김순배(74세)씨로부터 당시의 정황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옹기짓는 일을 접은지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가마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점동의 마지막 옹기장이 김순배씨
프라스틱 식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쇠퇴하기 전까지 이 마을 40여 가구의 주민들이 대부분 옹기점에서 일을 했다하는데 옹기를 구하기위해 몰려드는 행상들로 마을이 넘쳐 났었다는 것.
옛 가마터에 아담한 집은 짓고 사는 마지막 옹기장인 김순배씨는 영화로웠던 점동의 과거를 회상하는 듯 연신 지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장암교 방면으로 길이 나기전까지 감천에서 구성방면으로 가는 큰 길 구실을 했었다는 성황고개도 이제는 잊혀진 옛길로 남고 마을앞 우뚝 선 장승만이 길손을 배웅할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