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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조마면편(신안1리)

관리자 기자 입력 2008.01.17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마을이야기(134)




조마면편




▷신안1리 (죽정竹汀)




양천동으로부터 조마면 방면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신안1리, 죽정마을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죽정리로 불렸는데 1914년 인근의 신동,구미,지동,신하,안서,신기,신촌을 통합해 김천군 조마면 신동(新洞)의 신(新)자와 안서(安棲)의 안(安)자를 따서 신안동(新安洞)이라 했다가 1962년 죽정을 신안1동으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사간원 승지를 역임한 성산배씨 10세손 배한(裵閑)의 차남 진사 배윤순(裵允詢)이 단종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등 충신들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세상을 한탄하며 식솔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신하로 낙향해 입향조가 되었는데 뒤에 후손들이 1890년경 죽정으로 이주한 이후 성산배씨 신안파가 대대로 집성을 이루어오고 있다.


죽정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배상유(裵尙瑜)라는 후손이 내신(안새래)으로 분동해 정착한 이래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다하여 죽전(竹田)이라했고 또 감천변에 대나무가 많다하여 물가정(汀)자를 써서 죽정(竹汀)이라 했는데 지금은 죽정으로 통칭되고 있다.













△ 마을노인회장 최재훈(79세)씨가 마을에 산재해있는 대나무밭을 가리키며 지명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안2리(중동中洞,뒤주골)


죽전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신안2리는 중동과 뒤주골 두 마을로 나뉘어 있다.


화순최씨 12세손 최세영(崔世英)이라는 분이 조선 명종때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최씨 집성촌을 이루어은 것으로 알려진다.


중동은 마을앞 큰들의 귀퉁이에 마을이 있다하여 들귀미라 부르고 한자로 구미(龜尾)라 적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때 마을이 유실되고 현재의 위치에 새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큰들 중앙에 마을이 있다하여 중동(中洞)이라 했다고 한다.


중동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한지골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뒤주골마을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풍수지리로 볼때 곡식을 저장하는 뒤주와 같이 움푹 패었다하여 뒤주골이란 지명을 얻은 것이라고 마을이장 이용호(49세)씨가 전한다.


한지골과 뒤주골에서 중동을 거쳐 감천으로 연결되었던 제방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 꿈틀대며 흘러간다하여 용제방(龍堤防), 후룡(後龍)으로 불렸다는 이 마을의 명물 방천은 1970년대 경지정리 와중에 사라지고 지금은 동민들 가슴속 추억으로만 살아 있을 따름이다.












△ 마을노인회장 권중오(77세)씨가 뒤주골의 지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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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3리(안새래內新)


조선시대까지 신하리(新下里)또는 내신(內新)으로로 적고 안새래로 불린 신안3리는 마늘산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만력골짜기입구에 마을이 있다하여 만력동(萬曆洞)으로도 불렸다.


새래라는 지명은 새신(新)의 변음으로 보이며 1658년 성산배씨 배금겸(裵今謙)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성산배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마을안쪽에는 배흥립(裵興立)삼대(三代)정려각이 섰는데 1617년 사별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경주김씨부인과 이순신장군의 선봉장으로 임란때 공을 세운 아들 배흥립장군, 병자호란때 공신이 된 손자 배명순(裵命純) 등 3대에 걸쳐 정려가 내렸다.













△ 안새래마을의 배흥립 삼대정려각.


삼대에 걸쳐 정려가 내린 보기드문 정려각으로 꼽힌다.


 




<글/김천문화원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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