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마을이야기(135)
조마면편
▷신안4리
(밧새래外新, 안서安捿,저목골)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해 신하(新下),안서(安棲)로 불렸는데 1914년 인근마을과 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신안동으로 개칭되고 1962년 밧새래, 안서동, 저목골이 신안4동으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연산군때 형조참의와 전라감사를 역임한 화순최씨 10세손 최중홍(崔重洪)의 손자인 최세영(崔世英)이라는 선비가 조선선조때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최씨 집성촌을 형성해왔다고 전한다.
안서(安捿)라고하는 지명은 화순최씨 일가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편안하고 살기좋은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며 편안할 안(安)자와 머무를 서(棲)자를 써서 안서동(安棲洞)이라 했다고 전하며 화순최씨 집성촌답게 선조를 제향하는 남애정(南厓亭)과 백원당(百源堂)이 세워져 후손을 지켜주고 있다.
백원당 옆으로는 화순최씨 가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선조를 추향하기위해 운영했다는 구제서원(懼齊書院)터가 남아있다.
△안서동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구제서원이 있던 터를 마을이장 최도식씨가 가리키고 있다.
밧새래라는 지명은 입향조 최세영 公이 내려와 새로 정착했다하여 새신(新)에 아래하(下)자를 써서 신하(新下)라고 했는데 이 마을이 신하로 통칭되는 일대마을의 외곽에 있다하여 외신(外新)이라 적고 바깥신하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밧새래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뒤 영탑골로 불리는 골짜기에는 도 문화재자료 191호인 고려시대 양식의 거대한 석불이 감천을 굽어보고 섰다.
이 불상은 영탑골 사찰이 폐사된 후 땅속에 묻혀있다가 밭을 일구던중 발견되어 1987년 문화재로 지정되고 1996년 현재의 보호각이 설치되었다.
마을이장 최도식(59세)씨에 따르면 1980년대 골동품수집상이 불상을 가져가기위해 없던 길까지 내가며 준비를 하던 것을 주민들이 행정기관에 알려 반출을 막았다고 한다.
△영탑골 옛 절터를 지키는 석불입상과 보호각
보호각에 불상이 봉안된 후 뒤늦게 원래의 좌대(座臺)가 발견되어 뒤편에 자리를 지키고 있고 불상의 두상(頭狀)은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떼어갔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신안5리
(지동池洞, 새터新其, 새래숲)
조마면소재지로 향하는 지방도에서 신안3리 안새래로 가기전에 위치한 마을로 지동, 새터, 새래숲 등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1962년 신안5리로 분동되었다.
동회관이 있는 지동은 마을앞에 조선시대에 성산배씨 집안에서 주동이되어 축조되었다는 큰 저수지가 있음으로 해서 못지(池)자를 써서 지동(池洞)이라 했다고 하는데 또 다른 자료에는 어조사지(只)자를 써서 지동(只洞)이라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마을은 안새래와 밧새래에서 분가한 성산배씨와 화순최씨 일가들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고 주민 이기진(75세.신안교회 장로)씨가 전한다.
△지동저수지와 보호수로 지정된 땅버들나무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다운 눈이 쏟아지는 이른 아침, 회관앞에 홀로선 웅장한 버드나무가 저수지 설경과 어울려 더없이 아름답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