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36)
조마면편
▷신곡3리(백화동.신석.중리)
강곡리 강바대마을에서 성주방면 지방도를따라 가다보면 가제산과 시루봉사이에 백화동,신석,중리등 3개마을로 구성된 신곡3리가 자리잡고있다.
초입의 백화동은 성주이씨 13세손으로 숙종때 진주병마절제사를 역임한 이유항(李維杭)이 거창군 가북면에서 입향해 정착한이래 대대로 성주이씨 백화동파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백화동이라는 지명은 영조때 입향조인 이유항의 아들 남강(南岡)이세간(李世幹. 1724-1795)이 부친의 병환을 지성으로 구환하자 엄동설한에 살구꽃을 비롯한 많은 꽃이 피어 이를 약으로 썼다하여 백화동(百花洞)이라 했다하고 또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할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감싸주었고 호랑이가 살펴준 만고의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는데 이후부터 효자동(孝子洞)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 남강 이세간선생을 모신 상친사
마을에는 이세간을 비롯한 성주이씨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상친사(尙親祠)가 섰는데 시묘살이때의 인연으로 함께 살던 호랑이는 이세간이 졸하자 울면서 굶어죽었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후손들이 호랑이 그림을 상친사 벽에 그리고 뒤뜰에 의호신령비(義虎神靈碑)를 세워 호랑이와 남강선생을 추모했다고 한다.
그때의 호랑이 그림은 필자가 처음 상친사를 찾은 10년전 만해도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수년전 상친사를 개축하면서 사라져 이제는 볼 수 가 없게 되었다.
이세간의 손자인 진사 이주룡(李周龍. 1819- )도 효자로 이름이 났는데 네 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을 키우다 배가고파 우는 동생을 업고 뜰에 나아가 통곡하니 땅이 갈라지며 샘이 솟아 그 물을 먹여 동생을 키웠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뒤에 사람들이 이 샘을 가리켜 유천(乳泉)으로 불렀고 지금도 상친사 아래에 샘이 온전히 남아있다.
상친사 입구에 집을 짓고 3대째 사당을 지키고 있는 후손 이종환(73세)씨는 자랑스런 조상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 효행에 감복해 땅이 갈라지며 물이 솟았다고 전해지는 유천(乳泉)과 상친사를 3대째 지키고 있는 후손 이종환씨
백화동위로는 순천박씨 집성촌으로 유명한 신석동(新石洞)이 나온다.
신석이 변해 새석이,새식이,새수골로 불리는 신석동은 단종복위운동에 연좌되어 양주에서 부항면 유촌으로 낙향한 7세손 박수종(朴守宗)의 손자로 명종때 군기사주부를 역임한 박경순(朴景淳)의 차남 박홍발(朴鴻發. 1601- )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순천박씨 군수공파 집성촌을 이루어왔다.
마을중앙에는 이 마을출신으로 순조때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박빈(朴斌)의 처 함양오씨를 기리는 효열각이 섰는데 함양오씨부인은 시아버지를 10년간 지극으로 간병하고 남편 박빈이 졸하자 음식을 끊고 3일만에 자결을 택한 효부이자 열녀로 기록되고 있다.
지역 유림의 천거로 1888년(고종25년)에 부인에게 정려가 내리니 신석동은 이웃한 백화동과 함께 효열(孝烈)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 함양오씨효열각과 후손 박임동(72세)씨
찾는 이 없는 저녁, 상친사 오르는 길을 말끔히 치워놓은 성주이씨후손 이종환할아버지의 마음씨 만큼이나 백화동의 설경이 아름답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