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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마을이야기(조마면 신곡 1리)

관리자 기자 입력 2008.02.15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마을이야기(137)


 


조마면편


 


▷신곡 1리(나부리,마와리)


 


 조마면과 지례면 이전리 경계를 이루는 꿀고개 아래에 자리한 신곡1리는 나부리와 마와리 두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두 마을은 조선시대말까지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속했는데 1914년 나부리,마와리,미실,철수동,중리,신석,백화동이 합해져 김천군 조마면 신곡동으로 바뀌었고 1962년 나부리와 마와리가 신곡1동으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최씨와 벽진이씨가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는 나부리는 일설에 벽진이씨 이나부(李羅浮)라는 분이 정착한 이후 입향조의 이름을 따서 나부리라 했다고도 하는데 마을이장 박중길(71세)씨는 마을이 풍수적으로 벌통혈에 해당되어 언제나 벌이 날아다니는 둣한 소리가 들려 나부리라 했다고 하며 그래서 마을에서 지례로 넘어가는 고개를 꿀고개라 했다고 믿고 있었다.












▲ 마을이장 박중길씨가 꿀고개를 가르키며 벌통혈에 자리한 마을의 풍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부리 맞은편 염속산자락에 위치한 마와리는 마을일대의 지형이 말이 누워있는 형상이라하여 말마(馬)자에 누울와(臥)자를 써서 마와리(馬臥里)라 했다고 하고 또는 말의 이빨에 해당된다하여 어금니 아(牙)자를 써서 마아리(馬牙里)라 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에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어 마와리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조선시대에 나부리 뒤 골짜기에 군량미를 조달하기위해 나라에서 병사들을 동원해 개간했다는 둔전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마와리와 말목장이야기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신곡2리(미실,철수동)


 


 나부리와 중리 사이에 위치한 미실과 철수동은 1962년 신곡2동으로 분동했는데 나부리,마와동과 함께 가재산과 염속산자락에 자리하고있다.


 


 미실은 임진왜란이후 성주이씨와 파평윤씨가 정착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는데 과거 조마면소재지 일대의 경작지가 감천의 잦은 범람과 가뭄으로 흉년이 들때에도 물이 좋은 이 마을은 쌀농사가 잘되었다하여 쌀미(米)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미곡(米谷)이라 적고 미실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을주민 김창윤(65세)씨에 따르면 수 십 년전까지만 해도 장암일대의 농지보다 미실마을의 농지가격이 더 종았다고 한다.


미실마을 맞은편의 염속산 기슭에 자리한 철수동은 예부터 철이 생산되고 바람골,큰골,목골,두리봉등 크고작은 골짜기에서 흘러드는 계곡물이 사시사철 좋아 쇠붙이를 생산하는 철점(鐵店)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쇠철(鐵)자에 물수(水)자를 합해 철수동(鐵水洞)이라 했고 철점,쇠점골,씨종골등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마을계곡 에는 철분이 함유된 붉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철수동에는 인근마을 여섯 가문의 아홉 선비가 모여 시계(詩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위해 세웠다는 구로재(九老齋)가 마을중앙에 높이 섰는데 곧 진주강씨 강이무(姜履武), 강체형, 하빈이씨 이면성(李綿成), 인천이씨 이지배(李之培),이창익(李昌益),이장익(李章益), 성산여씨 여학조(呂學祖), 의성김씨 김학태(金宗泰), 고성이씨 이희(李僖)등 9인이다.


 


 구로재 맞은편에는 150년전 아홉분의 선비가 함께 쌓고 심었다는 시단(詩壇)과 전나무가 염속산과 계곡을 벗하며 서있다.


 


 수년전 현대식 함석 기와를 얹은 덕분으로 누수는 용케 면했다고는 하나 미쳐 대비를 못한 대문채는 주저앉아버려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 미실마을의 의성김씨후손 김창윤씨가 구로재를 안내하며 무너진대문채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설경에 갇힌 철수동을 돌아 나서자니 옛 선비들이 읊던 낭낭한 싯구가 계곡을 따라 울려 퍼지는 듯 하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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