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38)
조마면편
▷신곡 1리(수왕, 박리, 용암)
조선시대에 김산군 남천면(南川面)에 속했던 이들 마을은 1914년 이웃한 신계,송정과 합해 김천군 조마면으로 개편되면서 신계(新溪)의 신(新)자와 수왕(水旺)의 왕(旺)자를 써서 신왕동(新旺洞)이라 했고 1962년 박리,수왕,용암 3개마을을 신왕1동으로 분동한후 오늘에 이르고있다.
성주방면 997번 지방도변에 자리한 박리마을은 현재는 진주강씨 집성촌이지만 원래 김해김씨일가들이 정착해 살면서 일대 들판이 넓고 살기좋다 하여 넓을 박(博)자를 써서 박리(博里)라고 했다고 전한다.
△활의 시위를 당긴 것과 같이 둥글게 마을이 생겼다고 전하는 박리마을
또 달리 일설에는 마을의 지형이 바가지를 닮았다하여 바가지와 음이 비슷한 박리(朴)자를 써서 박리(朴里)라 했다고도 한다.
마을주민 강전탁(67세)씨는 예부터 마을이 활(弓)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결국 바가지의 곡선처럼 휘었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박리 안쪽마을인 수왕은 물왕실로도 불리는데 조선 순조때 의성김씨 처율(處律)이란 분이 성주벽진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물이 흔해야 후손들이 번창한다는 염원을 담아 물수(水)자에 성할왕(旺)자를 써서 수왕(水旺)이라 했다는 것이다.
△용암마을의 자랑이자 지명의 유래가 된 용바위. 마을뒷산을 휘감아 돈 용이 대방천에서 고개를 처들고 있는 형상이라고 전한다.
박리로부터 하천을 넘어 매봉산 아래에 자리잡은 용암마을은 하빈이씨 집성촌으로 마을앞 대방천에 용의 머리를 닮은 용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어 용용(龍)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용암(龍岩)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풍수지리로 볼때 용암마을 뒷산이 용의 몸통이며 이 바위가 용의 머리라 하여 예부터 신성시했는데 이같은 믿음은 지금도 지켜져 수년전 하천변에 도로포장을 새로 하면서도 용의 몸과 머리를 단절시키지 않기 위해 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포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왕2리(송정,신계)
1962년 신왕2동으로 분동된 송정,신계 두 마을은 신왕2동으로 속한다.
감천면 용호리와 조마면의 경계에 자리잡은 신계는 3백여년전에 밀양박씨가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 부유한 양반들이 주로 살았었는데 풍수적으로 볼때 마을의 기운이 너무강해 인근에 살던 하층민인 백정들을 의도적으로 살게하여 지기(地氣)를 눌렀다는 것이다.
이때 마을에 들어온 하층민들을 낮추어 부르던 “곱드리”가 마을의 지명이 되었다고 마을노인회장 박세진씨(74세)씨가 전한다.
이후 1936년 병자년 수해때 마을앞 대방천이 범람해 마을이 매몰된후 물길이 변해 하천이 새로 생겼다하여 새신(新)자에 하천계(溪)자를 써서 신계(新溪)또는 하신계(下新溪)라 했다고 한다.
신계 안쪽의 송정마을은 칠곡에서 진주강씨 상식(尙植)이라는 분이 입향한 이래 대대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마을입구에 큰 소나무가 있어 소나무 송(松)자에 정자정(亭)자를 써서 송정(松亭)이라 했다고 전해진다.△마을입구의 소나무룰 배경으로 다소곳이 들어앉은 송정마을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