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마을이야기(144)
대덕면편
▷중산1리(중산 中山)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으로 속했던 중산마을은 1914년 이웃한 다화마을을 합해 중산리라 했다가 1949년 대덕면으로 편입되었고 1960년 중산을 중산1리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도변에 자리한 중산마을은 조선세조 때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을 역임한 서산정씨 정사용(鄭士鎔)이라는 분이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서산정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 국도변에서 바라본 중산마을 전경
중산마을 입구에는 수십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작은 숲이 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마을 뒷산이 무너지면서 함께 떠내려온 토사와 어린나무들이 성장해 형성된 숲이라 전해진다.
▲ 병자년 수해 때 떠내려온 토사가 모여 숲으로 변했다는 중산숲 중산마을 주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중산에서 관기리로 가는 구(舊) 도로변의 속칭 박바우모티이에는 박몽열 현감과 부인 문화류씨를 기리는 충렬각이 고즈넉이 서있다.
박몽열(1555-1597)은 밀양박씨로 황간현감 재임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간, 개령, 상주등지에서 의병을 조직해 대항하다 역부족으로 패하자 진주성으로 달려가 분전하다 촉석루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부인 문화류씨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투신자살을 했는데 당시 아들 영백(英伯)이 8세때의 일이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있다가 우암 송시열이 한준고사(韓俊古事)에 이 사실을 수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1882년 뒤늦게 정려가 내리고 처음에 다화마을앞에 세워졌다가 뒤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박몽열현감과 부인 문화류씨 정려각 |
충렬각이 자리한 박바우모티이에는 바위 절벽아래 아들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었고 아들낳기를 간절히 빌면서 돌을 던지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아들바위가 있었는데 국도확장공사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예전 아들바위가 있었다는 박바우모티이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아들바위가 못내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