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50)
대덕면편
▷연화1리(연화실)
대덕면소재지에서 무주방면으로 가다 도로변에 자리잡은 연화1리는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연화로 불렸는데 1895년 남면이 나뉠 때 상남면이 되고 1914년 인근의 소태실을 합하여 연화리가 되었다가 1960년 연화1리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른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때 상주판관으로 재임하다 전사한 쌍호(雙湖) 장홍한(張鴻翰)의 처(妻) 연안이씨 부인이 아들 귀동(貴東)을 업고 외가곳인 대덕 연화에 정착한 후 대대로 인동장씨 판관공파 집성촌을 형성해오고 있다.
△장홍한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는 쌍호정
마을앞 덕산천변에는 후손들이 선조인 장홍한을 기리는 쌍호정(雙湖亭)과 쌍호장선생유허비(雙湖張先生遺墟碑)가 나란히 서서 이방인을 맞는다.
또 소태실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역시 장홍한을 제향하는 재실 충의사(忠毅祠)가 꼿꼿이 서서 길손을 맞는데 이 제실은 무풍에서 5년간 목재를 소와 지게로 옮긴 끝에 건립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연화실 인동장씨 제실인 충의사와 장홍한선생 사적비
연화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만발해 연밥연(蓮)자에 꽃화(花)자를 써서 연화(蓮花)라하고 연화실, 여내실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연화2리(소태실)
연화실마을과 이웃한 연화2리 소태실은 임진왜란때 안동김씨 김응보(金應?)라는 분이 피난을 와서 정착한 마을로 전해진다.
소태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 어느 왕자의 태(胎)를 마을 굴밧골 뒷산에 안치했다 하여 동명을 태실(胎室)이라하고 그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했다고 하는데 뒤에 왕자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자 “예전의 태실”이라는 의미의 소태실(小胎室)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소태(小台)로 한자가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태봉산은 삼각형태로 우뚝 솟아 한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산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는데 어떤 사유로 태실이 이안되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소태실 마을전경. 마을뒤로 삼각형태로 우뚝솟은 태봉산이 보인다.
태봉산으로 오르는 길 우측 산지당골에는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강필수라는 총각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있는데 강총각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도 위풍이 당당하여 지체 높은 양반이 말을 타고 거만스럽게 지나가다가도 총각앞에서는 말이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마을 중앙에 있었던 신당을 지금의 산지당골로 옮긴 후 이를 주도한 마을 주민에게 흉사가 끊이질 않았다고도 하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 제를 올릴때 제수로 사용할 곡식을 밖에 내어두어도 들짐승, 날짐승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등의 기이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한국전쟁 와중에도 마을이 무탈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신당에 모신 강총각이 마을을 도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라 고 믿고 있었는데 지난 2002년 수해때 신당이 유실된 후 복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