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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신년축시-김천을 아시나요

정효정 기자 입력 2017.01.04 14:34 수정 2017.01.04 02:34

↑↑ 정선기(시인) 봉계 출생. ‘심상’ 신인상 당선 등단. 부산일보 논설주간, 부산크리스천문인협회회장, 다솜시사랑클럽회장, ‘시와 사상’ 편집위원, 부산여대 겸임교수, 동서대 객원교수, 한국기독신문 주필 역임. 현재 교회복음신문 주필. 시집 ‘바다의 말’, 칼럼집 ‘나그네 예수’ 등 다수.
ⓒ 김천신문
선사적부터 명산대천 유구한 역사의 고장 김천을 아시나요.
옛날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김천이라 했다던가.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그렇게 좋고 향기가 높아 그 샘물을 주천(酒泉)이라 했다지요. ‘택리지(擇理志)’에 “김산(金山) 서쪽은 추풍령(秋風嶺)이고 영서는 황악산(黃岳山)이라. 황악산·덕유산(德裕山) 동쪽의 물이 합쳐 감천(甘川)을 이뤄 낙동강(洛東江)에 흘러 들어간다. 유역에 도읍으로서 지례(知禮), 김산(金山), 개령(開寧)이 있다. 선산(善山)과 함께 관개의 이(利)를 누려 논이 기름지고 주민은 토지에 안주하여 죄짓기를 두려워하며 나쁜 일을 멀리하는 까닭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士大夫)가 많다”고 했더이다.

삼한시대에는 이 지역이 감문국이었다는 걸 아시나요.
김천 지역은 삼한 시대에 감문국(甘文國)과 주조마국(走漕馬國)이 있었고 신라 때는 김산군에 속하는 산간 촌락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 역마제도가 생긴 이후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지요.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했고 1995년 도농 통합으로 김천시와 금릉군이 합쳐 새로운 김천시가 되었더이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 대구와 대전의 중앙에 자리 잡은 김천은 교역의 중심지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더이다.

반봉건, 항일, 반민주투쟁에 나선 의혈의 고장 김천을 아시나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여대로(呂大老)가 의병을 모집하자 개령·김산 등지의 사족(士族)들이 대거 호응해 왜적을 무찔렀지요.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봉건 체제의 모순이 노출되고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1862년(철종 13년) 김규진(金奎鎭) 등의 주도하에 개령 민란이 일어나 민중의 반봉건 투쟁의 계기가 되었다지요. 1907년 이후 허위(許蔿)의 의병 부대는 김천·지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김천면에서는 3월 24일과 4월 5일에, 개령면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더이다.
 
기름진 금릉·개령평야 풍년가 울려퍼지는 김천을 아시나요.
대덕산과 우두령에서 발원하여 지례면에서 합류하여 북류하는 감천이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직지천과 합류하여 북동쪽으로 농소면·개령면·감문면·아포읍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가면서 기름진 개령평야와 금릉평야를 일궜으니 어찌 풍년가가 울려퍼지지 않으리오.
김천은 과일과 채소류, 특용작물이 전국 최대 생산지이거니와 조마면의 굵고 맛 좋은 감자, 감문면의 시원하고 당도 높은 금싸라기참외, 어모·감문·개령면의 완초, 봉산·대항면의 포도와 표고버섯, 지례면의 재래종 돼지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말고요. 

인구는 적지만 정직하고 기개있는 인물이 많은 김천을 아시나요.
김천은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어 아이 많이 낳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다지요. 김천시의 면적은 1천㎢로 경상북도 면적 1만 9천㎢의 5%, 전국 면적 9만 8천992㎢의 1%에 해당하는 넓이인데도 인구는 15만을 넘지 못해 애간장을 녹이지요. 서울과 맞먹는 면적에 인구는 서울의 100분의 1이니 적어도 너무 적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땅에서 아무리 많은 물이 솟아올라도 샘의 물이 붇지 않듯이 ‘금샘’인 김천의 인구는 붇지 않는 게 탓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인구는 적지만 예로부터 정직하고 기개있는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하였거니와 불세출의 시조시인 백수(白水) 정완영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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