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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합

삶의 향기- 밥 좀 해 줄까?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17.11.07 05:43 수정 2017.11.07 05:43

배영희(수필가·효동어린이집 원장)

ⓒ 김천신문
인슐린 약, 주사기, 소독솜, 혈당체크기, 그리고 지팡이와 휠체어, 여행 가방을 챙기며 몇 번이나 확인하였다. 엄마의 오랜 꿈을 이루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배낭을 메고 전국 일주 해 보는 것이 젊은 날의 로망이었는데 설렘 반 걱정 반의 시간들이 달력의 동그라미로 채워져 가고 더디어 출발 시간이 되었다.
백발의 엄마는 장롱 속을 뒤져 알록달록 옷가지를 챙기고 뽀얀 머리를 곱게 빗어 예쁘게 화장도 하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지팡이가 남사스럽다더니 이젠 휠체어에 편안하게 앉으신다.

군산에서 순천으로 그리고 경주 불국사를 거쳐 부산 해운대를 돌아본 다음 동해안을 따라 정동진까지 올라갔다가 김천에 오는 4박 5일의 기차여행이었으니 강행군이긴 하였다.
열차 칸을 방으로 만들고 방안에 침대랑 소파랑 샤워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기에 나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르는 열차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엄마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도 피웠고 사춘기 아들과 각별히 친해지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곳곳에 들러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듣고 지역의 별미도 참 맛나게 먹었다.
휠체어 밀고 다니느라 땀 흘린 아이 손을 잡으며 “우리 손자 대학 가는 것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다”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눈치이다.
이래저래 삼대의 전국 일주 여행은 무르익어만 갔다. 아! 이런 게 효도구나 싶었고 큰 맘 먹고 여행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셋째 날 아침부터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침대 열차라지만 밤새 달리다보니 집만큼 편하진 않았을 테고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힘들기도 하셨겠지. 그래도 그렇지, 정동진 그 아름다운 바닷가에 기차가 멈추고 차창으로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이글이글 떠오르는 저 감격스런 아침 해를 보는데 “이제 집에 다 왔나” 하시는 거다. 하얀 파도 소리 때문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응, 엄마 뭐라고요?”
“김천 다 왔나?”
엄마가 왜 그러시지?
“엄마, 저 바다 좀 봐, 여기가 그 유명한 정동진이야.”
그런데 엄마는 자꾸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내일이면 집에 갈 텐데 이러시면 안 되는데…….

겨우겨우 휠체어에 앉히고 아침 식사를 하러 갔는데 통 숟가락을 못 드신다.
아무리 아파도 입맛 없는 걸 모르는 분이. 이건 아닌데. 갑자기 별의별 생각이 다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만약 치매라는 뭐 그런 병에 걸린 거라면 이 일을 어쩌지? 직장 다니는 내가 엄마를 모실 수도 없고 자기 이름도 모르고 집도 못 찾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입장이 되면 이 일을 어쩌나…….

앗, 차라리 한 가지 꿈이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냥 무리하지나 말걸 그랬나 싶어 온통 머리가 하얗게 변해지는 것 같았다.
집으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도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를 수십 번은 더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지퍼를 열어 놓은 채로 잠이 든 엄마에게 겉옷을 벗어 살짝 덮어 주고 가방 안에 도대체 뭐가 들었나 싶어 전부 꺼내 보았다.

세상에, 냅킨과 똘똘 말아 놓은 휴지 뭉치가 딱 열다섯 장이 나오네. 이크, 진짠가 보다 인터넷으로 다급히 치매 증세를 검색해 보니 초기 증상이 분명하고 급격히 나빠질 수도 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집에 가면 당장 병원부터 가봐야겠다. 84세 엄마를 모시고 나온 게 후회가 되었다. 내 딴엔 그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누에고치 빈껍데기 같은 엄마를 모시고 집까지는 잘 도착하였다.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드리고 마치 갓난아기를 돌보듯 계속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일주일 쯤 지났을까. 엄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텃밭을 가꾸고 TV를 보고 잡곡밥을 손수 해 드신다.
“엄마, 지난번에 우리 어디 어디 갔었지? 경주에서 뭐 봤지?”
“야야, 네가 자꾸 물으니 헷갈리네. 내가 뭐 치매라도 왔는지 아는갑다.”
하하, 그땐 장거리 여행이라 일시적으로 그랬던 모양이다.
엄마, 고마워요 치매 걸리지 않아 진짜 고마워요. 그러나 여행은 이제 정말 끝이에요.

오늘은 새끼발가락을 다쳐 깁스한 딸이 맘에 걸리는지 전화를 하셨다.
“야야, 내가 가서 밥 좀 해 줄까? 우짜노, 네가 아파서 큰일이다”며 환갑 다 되어가는 딸에게 파파할머니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오직 엄마뿐인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걱정해 주는 엄마 때문에 코끝이 찡해 온다.
엄마, 사랑해요. 제발 치매만 걸리지 말고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엄마 없는 세상은 생각 할 수도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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