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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인터뷰

시민여성기자단이 달린다② 한국무용가 최동선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19.02.08 14:37 수정 2019.02.08 14:37

“나를 성장시켜준 도시 김천에서 춤으로 봉사하며 살 것”

ⓒ 김천신문
본사 시민여성기자단에서 두 번째로 만난 여성리더는 53년 동안 무용이라는 한 분야에서 우리 춤 보급에 힘써 온 한국무용가 최동선(66세) 선생이다.
최동선 선생의 첫인상은 단아하고 여성적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카리스마가 배어나왔고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기자단은 무용을 시작한 계기를 물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최동선 선생은  “막 열네 살이 되던 해,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우연히 들리는 풍악을 따라 이끌리듯 들어선 곳이 예술학교 교실이었고 거기서 가야금소리에 맞춰 춤추는 학생들을 보니 마치 선녀같았다”고 한국무용과의 강렬한 첫 만남을 기억했다.
당시 어린 최동선은 무작정 “이 학교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온 후 공무원인 아버지가 학비를 지원할 수 없다며 완고하게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장학생이 돼서 가까스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무용을 한다고 무시를 당해서 예술학교 배지를 가리고 다녔는데 1970년에 일본 한국관에서 공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또 대사님이 우리가 민관외교관이라고 이야기해주셨고 몬테나주 공연에서는 기립박수도 받았다. 이런 경험들로 자부심을 갖게 됐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춤을 추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무용을 시작하고 10년 정도 지나자 허전함이 밀려왔고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 시집을 온 곳이 김천이었다”고 슬럼프에 빠졌던 당시를 회상했다.
ⓒ 김천신문
최 선생은 “그 후 김천에서 무용을 알리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낯선 곳에서 외롭고 힘들 때는 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런데 1992년 김천시에서 문화상을 받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봤다. 이제껏 교만했었고 더불어 사는 것을 몰라서 외롭게 살았다는 깨달음이 왔다. 이렇듯 김천은 나를 성장시켜준 도시이다” 라며 제2의 고향 김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제자 양성에 대한 질문에는 “인간문화재 한영숙 선생님의 승무 살풀이 ‘태평무’를 사사했고 7세~80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많은 제자가 있으나 김천에서 그 인재들을 수용할 만한 자리가 없어서 다른 도시로 인재들을 뺏기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다른 도시로 간 제자들이 추는 춤이 변형되는 것을 느낄 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또 “창작무용이라는 다른 장르가 있기 때문에 전통무용은 전해져온 그대로 이어져야지 변형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동선 선생은 “어릴 때는 무대에 설 때 화장하고 예쁘게 춤추는 것이 무조건 좋았으나 50세가 넘어서부터는 무대에서 감정을 다 실을 수 없을까봐 겁이 난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연습하고 거짓말춤이 아닌 참된 춤을 추기 위해서 연습을 할 때부터 감정을 맞춰 감정선을 유지하고 공연에서 감정이 폭발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 근황에 대해서는 “62세쯤 정년퇴직하자라고 생각했었으나 막상 62세가 되어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고 김천을 위해 해놓은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부터는 무대공연을 접고 요양원에 재능기부봉사를 하는 등 다양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끝으로 최동선 선생의 이루고 싶은 꿈을 물으니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었으면 하는 것이 꿈이요 소망이다”고 말했다.
ⓒ 김천신문

인터뷰:김옥수 김동주
기사 정리:김동주
사진:김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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