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첨(李詹, 1345 고려 충목왕 1~1405 조선 태종 5)이 김천역을 지나며 읊은 시가 있다. ‘김천역을 지나며’(過金泉驛)’란 시인데 그의 문집 『쌍매당선생협장문집』과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동국여지승람』(1486 )에 전한다.
옛 객관은 산기슭에 의지하였고/높은 다리는 옅은 모래밭을 건너네/땅은 기름지고 가을볕은 곡식을 익히는데/나무는 늙어 해마다 꽃조차 못 피우네/말을 달려 역의 관리를 놀라게 하고/시골 바람결에 벌판의 노랫소릴 듣네/유연히 회포가 동요하여/좋은 계절에 나그네 되어 지나네//
그가 중앙 관리로서 김천역을 지나며 주위의 김천 정경을 그려 내었다. 그 때 김천역은 현 김천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다. 이첨은 목은 이색의 문인으로 종이를 의인화 해 선비의 도리를 우화한 풍자소설 「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 조선 태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장가이다.
시 ‘김천역을 지나며’(過金泉驛)’는 고려 말 창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1451년 조선 문종 1, 완간)가 나오기 훨씬 먼저인 것은 분명하다. 김천이란 지명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보인다. 이보다 훨씬 먼저 고려 중기에 임춘(林椿 1147 의종~1197 명종)이 김천의 대신 한골에 우거하며 문학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작품에 ‘김천’이란 소재가 들어간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산업화 시대에 출세를 위해 이촌향도(離村向都)하며 부르던 ‘경상도 사나이’(최치수 사, 김성근 곡, 남백송 노래)란 가요가 있다. 경상도 사나이가 출세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심경을 노래한다.
갈 길이 천리라고 기차도 울고 갈 때/낯설은 정거장에 푸른 등 깜빡이네/말만 듣고 가는 서울 이 몸이야 간다만은/김천아 잘 있거라 추풍령아 다시 보자/내 고향 경상도를 꿈길인들 잊으랴//
노래에서 부산, 삼랑진, 대구와 함께 김천, 추풍령은 떠남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경부선 개통과 함께 탄생한 철도 김천역은 우리 문학이나 가요에서 만남의 장소보단 떠남의 공간, 이별의 장소, 스쳐감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김천역은 고려 초에 생겼다김천역은 고려 초 문종 (재위 1046~1083) 때 생겼다. 역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역참제도는 487년(신라 소지왕 9)부터 시작되어, 고려 문종 때에 전국을 525개 역, 22개 역도(驛道:역과 역을 연결하는 국도)로 구분했는데 1061년(문종 15)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이 때 이 고장에 김천역(김산현), 장곡역(지례현), 작내역(지례현), 추풍역(어모현), 부상역(개령현)이 탄생했다(『고려사』 권82 병지2). 당시 육지 교통로는 도로 뿐이었으며 도보, 승마차, 가마가 교통수단이었다. 조선시대 들어 역참제도는 더욱 확대되어 세종 때에는 김천역이 관할에17개 속역을 두었다(『김천시지』).
이래 김천은 지례, 상주, 추풍령, 성주로 도로가 열리며 교통중심지로 발전했다. 도로를 따라 인근의 농산물과 멀리 남쪽으로부터 낙동강, 감천을 타고 올라오는 해산물이 집하되어 김천장이 형성되었다. 감천 부근, 오늘날의 용두동에서 시작된 교역 공간이 김천장의 원초다. 김천장은 조선 후기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발달하며 김천에 경제적인 영광을 가져오게 했다.
최근 김천시에서 많은 노력 끝에 사명대사공원에 김천시립박물관을 개관했다. 만시지감이 있지만 우리 고장의 방대한 역사 자료를 체계적으로 전시해 시민들에게 문화복지감과 역사 문화적 자긍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2층 입구 시대별 김천역사 소개에 보면 조선시대에 ‘김천지역에 역(驛)이 들어서고…’라 설명하고 있다. 내부 전시장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고려시대에 김천역이 탄생한 것으로 소개한다. 한 건물 내에서 김천역 탄생 시기에 관해 설명이 일치하지 않는다.
KTX 김천(구미)역 개통 후 구내 화장실에 김천역의 내력을 담은 홍보물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읽어보니 김천역이 조선 세종 때 생긴 것인 양 소개한다, 그것도 역 구내의 화장실에서. 이에 김천문인협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역장을 만나 시정을 요구했는데 지금 그 게시물은 자취도 없이 철거되어 보이지 않는다. 1천년 역사의 김천역 소개 홍보물은 화장실이 아닌, 만인이 보는 떳떳한 장소에 설치해도 뭣할 게 없을 것이다.
김천 경제의 부침은 육로교통 사정과 함께 해왔고 함께 하고 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 1923년에 경북선이 개통되고 도로도 선산, 거창, 대구, 대전까지 확장돼 상품을 사통팔달로 직거래 하게 되었다. 이에 오히려 김천장이 교역 거점의 기능을 잃어가며 경제성 쇠퇴를 맞기도 했다. 8·15 해방이 되자 교통요충지 김천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철로 교통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66년에는 김천에서 삼천포를 잇는 김삼선 개설 기공식을 가졌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며 전국이 1일 생활권에 들었다. 이는 김천으로 하여금 교통발전에 따른 전환적인 경제활동을 요구했는데 이에 김천이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해 ‘김천이 교통으로 흥하고 교통으로 망한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육로교통과 역과 장은 김천발전의 동력이다
김천의 역사와 발전에 육로교통과 역과 장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도로와 철로 교통, 그로인한 역과 장의 발달로 김천의 시세는 확장되어 왔다. 지금 김천은 2개의 역과 4개의 고속도로 나들목을 두고 경북의 드림벨리를 유치해 중앙의 12개 공공 기관을 포용하고 있다. 이러함에 육로 교통의 이점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김천의 콘셉트는 육로교통을 통한 교류다. 예로부터 한반도 중부에서 물자와 인재와 문화가 영남을 접할 때 먼저 통과하는 곳이 김천이다. 이제 60년 전에 기공식만 하고 과제로 남겨 둔 김천-남해지방 간의 철로 개설이 실행될 것 같다. 서울-충주-문경-김천-진주-거제를 관통하는 이른바 중부내륙고속철도, 그 허리 역할을 김천이 하게 될 것이다. 이 고속철도는 김천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다. 평양, 신의주, 북경,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뻗어 나아가며 물자와 인재와 문화를 교류할 것이다. 21세기 김천은 단순히 스쳐가는 곳, 지나가는 고장으로 남아 있어선 안 될 것이다. KTX 김천(구미)역 개통 때 쓴 졸시(「우리 이제 케이티엑스에 오르네」) 한 구절을 읊는다.
… 머언 삼한시대 감문국, 조마국의/칡꽃만큼 소박한 이 고장 사람들/이룰 일 많은 사람들로 김천은/일찍부터 길이 열렸네/고려시대 김천역, 조선시대 5대장의 하나인/이 땅에 이룰 일 많은 사람들이/삶의 터전을 잡고, 늘상/사통으로 분주히 드나들었네/할배와 당숙과 큰아버지와 고모가/잘 영근 감자를 캐어내고/자두를 따 내고, 고기를 잡고/벼를 베어내곤 하였네/아아, 새해의 붉은 해가/이마 비춰 우리를 맞는 이 아침/경부선 열차의 기적소리/메아리 되어 울려 퍼지니/머리 위 푸른 길이/새 마음으로 손짓을 하네 ….//
민경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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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륙교통의 거점인 아포 나들목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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