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년 세월의 벽을 넘어, 조선조 제19대 숙종(이순)의 계비 인현왕후가 자신과 3년의 애잔한 인연을 품고 있는 김천의 가을에 돌아왔다. 뮤지컬 인현왕후 공연과 지난 2일, 천년고찰 불령산 청암사 보광전 앞마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인현왕후 복위식 재현행사가 그것이다.
송기동 문화원사무국장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청암사 율학승가대학원장 지형스님, 주지 상덕스님, 김충섭 시장, 이명기 시의회 의장, 최병근, 조용진 도의원, 박복순 시의원, 더불어민주당 배영애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중앙당부대변인 황태성, 전정식, 박찬우(前)시의원, 민권기 여흥민씨대종회부회장, 민경탁 여흥민씨김천지부장 등 내빈들과 스님 및 400여명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폐서인이 왕후로 재현되는 광경을 주시했다. 올해부터 여흥민씨대종회도 복위식 재현 행사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참석, 관람했다.
행사는 11시 자양전에서 인현왕후 애니메이션 상영과 대웅전 앞마당의 사진전으로 시작됐다. 점심공양 후 개최된 복위식 재현의식은 청암사 스님들의 인현왕후기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과 약사여래영주(藥師如來靈呪)’ 독송을 시작으로, 호송예관 김충섭 시장이 “전 왕후 여흥 민씨에게 내리노라, 즉시 환궁토록 하라.”는 숙종의 교지 전달, 왕후정복으로 환복한 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내명부 상궁과 내금위 별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환궁하는 행차의 재현 순으로 진행됐다.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년)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681년(숙종 7년) 5월 2일, 당시 21세인 조선왕조 제19대 임금 숙종(이순)과 가례를 올리고 국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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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형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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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현왕후의 외조부인 송준길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각별한 관계였고, 서인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즉, 가문의 후광뿐만 아니라, 서인 전체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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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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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입궁 5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는데, 당시 숙종은 장옥정을 총애하여 종4품 숙원으로 책봉하고, 다시 정2품 소의로 품계를 올렸다. 그리고 1689년 장소의가 출산한 이균(경종)의 ‘원자정호’를 반대한 송시열과 서인을 숙청한 기사환국이 있었다, 그 결과 9년 만에 남인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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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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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의 23세 생일에 숙종은 대신들을 편전에 불러, ‘성종 때 폐비된 윤씨 죄는 단지 투기에 있었는데, 민씨의 죄는 윤씨보다 더하고, 그녀에게 볼 수 없었던 행동까지 겸했다. 폐비하여 서인으로 삼아 친정으로 돌려보내니 예관들은 이 내용을 종묘에 고하라.’라는 교지를 내려 폐비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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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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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중인역관의 서녀천출인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사대부가문 교육을 받지 못한 장씨는 인현왕후가 보여준 국모의 교양과 덕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런 중전의 행태는 왕과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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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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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세간에는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더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라는 풍자노래가 퍼졌는데,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 장다리는 중전 장씨를 상징했다. 즉, 숙종에게 장다리 장옥정에서 벗어나, 미나리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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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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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론 김만중은 《사씨남정기》를 지었는데, 이 소설은 명나라 유현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다시 맞아들인 다음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이 또한 인현왕후와 중전 장옥정을 빗댄 풍자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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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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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이반과 옥정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숙종은 갑술환국이란 정치적 해결책을 단행했고, 조정 권력을 장악한 서인은 인현왕후 복위를 추진했다. 남편에게 투기의 화신이라 매도당하며 궁에서 쫓겨난 지 5년,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생활과 병고에 시달렸던 초췌한 모습의 인현왕후가 환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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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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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친필 편지를 보내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고, 중전으로 복위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슴에 옹이가 맺힌 28세 인현왕후는 이순에 대한 야속한 마음에 몇 차례 거절은 했지만, 자신의 처신은 개인뿐만 아니라 서인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왕이자 지아비의 요구를 끝내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인현왕후는 복위한 뒤부터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고 썩어가는 괴질에 시달렸다. 장희빈 측 궁녀들의 감시를 받으며 병고에 시달리던 인현왕후 민씨는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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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뮤지컬 인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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