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씨 문중이 지역 명문(名門)으로 거론된 것은, 16세기 중반~17세기 초반 송오(松塢) 여응구(呂應龜)․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부자의 정치 사회적 활동과 17세기 이후 활발한 문중 활동의 영향이 크다. 두 부자를 배향(配享)한 경양서원은 김산 남인(南人)들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런 위상을 기반으로 성산(星山) 여씨는 지역의 남인계 대표 문중이자, 김산의 으뜸 문중으로 자리매김했다.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이었다. 1582년(선조15)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한강(寒岡) 정구(鄭逑)·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친교를 원했지만, 정도가 벗어났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완곡히 거절하는 태도를 보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송암(松庵) 김면 휘하 장수인 곽준, 문위와 함께 구국 의병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돌리며, 구성 기를에서 의병 500명을 모집했다. 김면(金沔)·곽재우(郭再佑)·권응성(權應聖) 등과 지례, 궁장, 석곡, 거창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천거로 지례현감(知禮縣監), 의병 소모관이 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 제6진은 곽재우(정암진 전투)와 김면에 의해 전라도 진출이 차단돼, 김산, 지례, 선산, 개령 일대에 분산 주둔했다. 별동대가 거창을 거쳐 전라도로 가려고 우척현(우두령)으로 향했지만, 7월 17일 김면 부대와 연합한 여대로, 권응성 등 의병연합군에 패퇴해 지례로 후퇴했다. 이 우두령 전투에서 여대로의 둘째 아들이자 권응성의 사위인 여희우가 전사를 했다.
퇴각한 왜적이 지례향교에 숨어들자, 지례 현감 여대로는 김면 휘하 중위장 황응남, 중위장 서예원, 의병장 권응성, 종사관 강절, 의병장 박이룡 등과 왜군이 점거한 객사, 관아, 사창(社倉)을 포위해 일망타진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지례전투는 의병부대가 본격적인 영토 수복에 나선 전환점이 되었다.
여대로 의병장은 이어 8월 3일, 거창 사랑암 전투에서 승리했고, 9월에는 진주목사 김시민과 합세해 3차례 전투 끝에 공자동을 탈환했다. 9월 15일 사랑암 전투, 25일 지례 석곡전투 그리고 11월 궁장, 석곡 두곡 전투에서 왜군과 격전을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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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오 여응구와 감호 여대로를 배향한 경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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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선조27)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자, 봉록을 털어 백성을 구제하는 선정을 베풀었다. 1607년(선조40)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있을 때, 북인 영수이자 당시 최대 권력자인 정인홍이 문종이와 부채의 상납을 부당히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며, “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 이 산중에도 이르네[倻山霜早 楮木盡枯 世間炎熱 亦到山林].”라는 시(詩)를 보냈다. 이로 인한 환로(宦路) 진출에 제약도 있었다.
평생 선비로서 의(義)를 중시했기에, 권력자 이이첨과 정인홍 회유에 굴하지 않았고, 광해군을 옹립하려 하자 귀향해 명망 있는 학사들과 담론하며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여대로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내직에 있었고, 주로 외직으로 있었다.
국란에는 의병을 일으켜 충성을 다했고,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의(義)에 살다 간 여대로의 묘소는 송죽리 궁장 마을 덕대산에 있다. 유허비(遺墟碑)는 금평리, 신도비(神道碑)는 송죽리 궁장 마을에 있다. 또한 광명리에 있는 경양서원(鏡陽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한편, 지난 3월 25일 성산 여씨 문중은 여정휘 회장과 여영각 부회장, 여환정 부회장 등이 주축이 되어 감호 여대로의 충절과 의(義)를 중시한 올곧은 정신을 본받고, 문중 간의 우애 및 친목 도모를 위해 전국문중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문중 임원진의 선출과 문중의 향후 입지 및 여대로 중시조의 정신을 거양(擧揚)할 방안 등을 모색했다.
그리고 오는 6월 12일, 여영각 부회장의 제의로 전국의 성산(星山) 여씨 문중이 다 함께 모여, 감호(鑑湖) 여대로의 후손으로서 의(義)를 중시하며 선비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올곧음과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바쳤던 그 충절(忠節)을 선양(宣揚)하기 위한 ‘창의격문’을 선포하는 재현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