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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최재호 역사인물 기행[27]

합동취재 기자 입력 2023.09.07 10:50 수정 2023.09.07 10:50

혜심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여보게 친구들, 제발 자비롭게 살게나!”


고려 말 보조국사의 법통을 이어받아 송광사의 2대 조사가 되었던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속명은 식(寔)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최완(崔琬)이고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어머니가 천둥과 벼락과 함께 하늘 문(天門)이 세 번 열리는 태몽을 꾸고 난 다음 혜심을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혜심이 출가하기를 청하였으나 어머니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유학(儒學)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시병(侍病)하였다. 그때 혜심이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두루 나타나는 꿈을 꾸고 난 다음 어머니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별세하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 현 송광사)를 창건하여 사람들을 크게 교화시키고 있던 초대 국사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재(齋)를 드리고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곧바로 머리를 깎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전날 밤 지눌은 송(宋)나라 때의 선승(禪僧) 설두중현선사(雪竇重顯禪師)가 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상히 여겼는데 혜심이 찾아왔으므로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이후 혜심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고행과 정진으로 선정(禪定)을 이루자, 지눌은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며 기뻐하였다.

1210년 지눌이 입적(入寂)하자 문도들이 조사(祖師)로 선사 혜심을 추천하였다. 이에 왕은 혜심에게 수선사를 계승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혜심이 수선사의 조사를 맡아 그의 고언(高言)한 선문(禪門)을 일반백성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설법을 펼치자 각처에서 많은 수행자가 몰려들어 강당이 항상 비좁았다. 이때 혜심의 화두는 “여보게 부처가 되는 걸 어렵게 생각 마시게, 자비롭게 사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일세”였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처럼 보이지만, 극락도 지옥도 마음속에 있는 법. 이 보다 더한 진리의 고언이 또 어디 있으랴.

1213년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은 혜심을 대선사(大禪師)로 지명하고, 수선사(송광사) 외에 진주의 단속사(斷俗寺) 주지도 겸하게 하였다. 그 후 1232년 몽골군이 침입하여 팔공산의 초조대장경을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혜심은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한 진병(鎭兵) 법회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한편, 대장경의 재조불사(再造佛事)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에 왕이 혜심을 여러 차례 개경으로 불러 그의 공로를 치하하려 하였지만, 혜심은 대선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사양하고 한 번도 개경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한다.

1233년 겨울 고된 업무에 시달리던 혜심에게 병이 나자 고종이 급히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케 하였으나, 노쇠한 혜심을 일으키기는 역부족이었다. 대장경판의 완성을 목전에 두었던 이듬해 6월 혜심은 마곡(麻谷) 등 여러 문인을 불러 앞일을 당부한 다음 가부좌를 한 채로 입적하였다. 고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왕명에 따라 당대의 재사(才士) 이규보(李奎報)가 찬하고 명필 김효인(金孝仁)이 받아 쓴 진각국사 비(碑)는 현재 강진 월남산 월남사지(月南寺趾)에 세워져 있다.
진각국사는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대장경판을 완성하여 국태민안과 함께 극락정토의 세상을 이루는데 평생을 바친 선사이다. 이러한 진각국사께서 언제부터인가 한 치의 양보나 배려도 없이 아수라의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상을 보신다면 과연 또 어떤 법어를 내리실까. “여보게 친구들, 제발 자비롭게 살게나!” 그의 음성이 귓전에 울려오는 듯하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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