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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전)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 교장 김영호
“선생님께 꼭 말해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저 성악 전공하거든요. 기억나세요? 6학년 때 교내노래대회 나간다고 선생님께서 음악 시간이 끝나고 피아노 옆에서 저 지도해주고 하셨잖아요. 그땐 부끄럼이 너무 많았는데 선생님 덕분에 자신감도 엄청 많이 얻었어요. 그 부끄럼 많던 애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성악의 길을 가고 있다니……. 참 세상일은 모르는 것 같아요 어떻게 될지. 그런데 신기한 건 초등학교 때 졸업앨범을 보니 제 장래 희망이 성악가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졸업앨범 하니까 생각나네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는 날에 지각한 애들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혼내지 않으시고 다 같이 박수로 환영해 주자던 말씀도 생각나요. 수학여행 가서도 한 방 한 방 다 돌면서 아이들 발을 손수 다 씻겨 주셨잖아요. 마치 예수님이 제자 발 씻겨 주듯이. 그때 저희 조(저도 그랬지만) 발 냄새가 심하다고 3번이나 통과 못하고 했었는데……. 기억이 새록새록 다 나네요. 정말 그땐 학교 가는 게 좋았는데…….”
2001학년도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제자로 한양대학교 음대 성악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수연에게 받은 편지의 일부분이다. 2001년에는 소설가 월탄 박종화의 소설 원작 여인천하를 드라마로 제작하여 배우 강수연이 주연을 맡은 여인천하가 자체 최고 시청률 49.9%를 기록할 만큼 유명세를 탈 때였다.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던 학생 강수연은 배우 강수연과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많이 닮았다. 그래서 6학년 강수연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여인천하가 되었다. 강수연은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8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2021년 5월 24일 월요일에 모교이자 영호가 교장으로 근무하던 교대부초를 방문했다. 그리고 2022년 11월 25일 금요일 꽃사슴음악의 밤에 출연하여 후배들에게 좋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2023년 8월 25일 금요일에는 영호의 정년퇴임식에서 축가를 불렀다. 지금은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소프라노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다음은 강수연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을 간추린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노란봉투가 있어서 보니 네 편지더구나. 서재에서 졸업앨범을 찾아서 네가 있는 쪽에다 편지를 넣고 출근했단다. 사무실에 와서 졸업앨범을 펴 본다. 우리 반 단체 사진 밑에서 ‘할 때는 하고 놀 때는 놀자’라는 문구가 보이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로 만든 반가에 ‘여인천하 강수연’이 들어가 있지. 그리고 네 사진 밑에 쓴 장래 희망에 ‘성악가’라고 되어 있는데 그 길을 가고 있다니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수학여행 가서 발검사를 한 이유는 발만 잘 씻어도 피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지. 또한 여러 명이 한 방을 사용하는데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도 있지. 제일 중요한 이유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나 누구 혼자 따돌리는 아이는 없나 등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이지. 그때 우리 반 발검사만 한 게 아니고 1, 2, 3반 모두 검사를 했을 거야. 수학여행 다녀와서 쓴 글과 교내 독서발표대회에 나간 원고도 함께 보낸다. 지금은 학교에 근무하지 않고 대구광역시교육과학연구원에서 교육연구사로 근무하고 있다. 2009년 7월 17일 금요일. 김영호 선생님이.”
영호는 지금은 폐교된 경북 김천시 아포읍의 대신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은 학원 걱정, 공부 걱정이 없었던 참으로 즐거운 나날이었다. 6학년 담임은 당시 30대 초반이셨던 김명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체육시간이면 아이들과 핸드볼이며 축구를 함께 하셨다. 누구도 편애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셨다. 1974년 2월의 아쉬운 초등학교 졸업식에는 평생 학교 출입을 안으셨던 어머니가 참석하셨다. 어머니는 그 당시 제일 고급 담배 두 갑을 쥐고 계셨다. 뒤에 들으니 어머니는 그 담배 두 갑을 선생님께 드리고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셨다고 한다. 5남매를 키우신 부모님이 선생님께 드린 유일한 선물이다.
강당이나 체육관이 없던 시절이라 칸막이 형태의 교실 벽면을 헐어서 교실 두 개가 임시 졸업식장이 되었다. 하루 전에는 예행연습이라고 해서 졸업장과 상 받는 연습, 노래 연습을 한 기억이 난다. 지금도 졸업생들이 기다리는 점심은 자장면이 많다고 한다. 70년대 시골의 졸업식이니 언감생심이다. 점심은 여느 때와 같이 집에서 먹고 오후에는 같은 마을의 남자 졸업생 7명이 각자 집에서 기다란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마을 어귀에 모였다. 논 가장자리에 위치한 얼지 않은 웅덩이 속의 말(물속에 나는 은화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건지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영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부분은 아포중학교로 진학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도 서너 명 있었다. 초등학교 때 영호의 장래 희망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의 장래희망과는 무관하게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39년 6개월 동안 교직에 근무하면서 학교에 31년 6개월을 근무했고 교육청에는 8년을 근무했다. 학교에 31년 6개월을 근무할 때 교장과 교감으로 7년 6개월은 근무했고 교사로 24년을 근무했다. 교사로 24년을 근무하면서 6학년 담임을 13번 했다.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에는 11년을 근무했는데 교사로 6년, 교감으로 2년, 교장으로 3년이다. 6학년 담임 13년을 하면서 강수연과 같이 어렸을 때의 장래 희망이 평생의 직업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많은 경우가 훨씬 많은 것도 보았다.
매년 1월이나 2월에는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모두가 중학교에 진학한다. 초등학교 학교생활기록부에는 진로활동의 특기사항에 진로 희망을 적기도 한다. 예전에는 졸업앨범의 이름 옆이나 밑에 장래 희망을 적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졸업앨범을 제작하지 않는 학교도 많다고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어릴 적 습관은 오래도록 고치기 어렵다는 것으로 좋은 습관의 중요성을 말한다. 어릴 적 꿈이나 장래 희망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꿈은 변하고 다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으니 그리 서운할 일은 아니다.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와 단계별 목표를 정하고 실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졸업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꿈을 응원한다. 그들의 꿈인 장래 희망이 아름답고 소중한 꽃을 피우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