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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자는(저 아이는) 누구라.” “동촌네 큰아들 영호라.” “영호라니?” “웃마(윗마을) 달수 형님의 아들 말일세.” “잘 모르겠는데…….” “김천고등학교 나오고, 7년 전엔가 대구서 초등학교 교장 됐다고 마을 잔치 했던 달수 형님 아들이라.” 2025년 4월 30일 수요일에 김천시 아포읍 대신3리 마을회관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나눈 대화입니다. 이날은 마을의 약식 경로잔치를 했는데 남자 어르신들이 계시는 방을 드나들면서 시중을 들고 뒷정리까지 하는 영호를 보고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누구냐고 물으니 옆자리에 계시던 세 분이 연이어 대답을 하는 과정입니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서로 간에 호칭을 할 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부인의 고향 마을의 이름을 부릅니다. 동촌은 김천시 아포읍 제석1리의 마을 이름으로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어릴 때 한쪽 눈을 실명한 어머니(고 임외분)는 아버지(고 김달수)와 함께 60년 이상을 경북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에서 농사꾼 부부로 살았습니다. 2012년에 어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2년 뒤에 아버지께서도 어머니 곁으로 가셨습니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풍족했고 지금은 그 누구도 결코 가난하지 않은 오남매(임숙, 남순, 흥숙, 영호, 영규)는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나 깨나 장남인 영호 걱정이었습니다. 영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유난히 부스럼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된 농사일을 마친 어머니는 저를 업고 컴컴한 산길을 돌아서 지금은 사과로 유명한 남면의 연봉이라는 이웃 마을 동네의원을 오갔습니다. 여름철 밤이면 십 여리 떨어진 동촌의 외갓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영호의 안식처는 아버지의 푸근한 등이었습니다. 말바우 마을 초입의 고갯마루의 성황당을 오갈 때면 모두가 작은 돌 하나씩 주워서 던졌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대신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김영호’라는 이름 석 자만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2학년 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6학년 때는 동아전과를 공부친구 삼아서 일취월장하게 되었습니다. 아포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에서 360여 명 중에 2등을 했습니다. 자랑을 하고 싶었던 영호는 유월은 긴긴 뙤약볕에서 온종일 모내기를 할 논장만을 마치고 지게에 써레를 지고 소를 몰아 동네 어귀에 들어서는 아버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소고삐를 받아든 영호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2등 했어요.” “잘 했네. 반에서 2등을 했구나.” “반에서 2등이 아니고 2학년 전체에서 2등을 했어요.” 아버지는 2학년 첫 시험에서 반에서 7등을 했던 영호가 당연히 반에서 2등을 한 것으로 지레짐작을 한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도 먹었던 어머니의 칼국수는 그 후로 호박범벅, 메밀묵과 함께 영호의 3대 기호 음식 중에서도 최애 음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생겼습니다. 김천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늘 공부를 설렁설렁 했던 영호는 고등학교 때는 공부가 더 하기 싫어졌습니다. 가장 열심히 할 시기에 공부의 끈을 움켜쥐지 못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든 아버지는 농사일로 피곤한 육신에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래 공부 할라카마 때리치아라.” “예, 때리치우겠습니다.” 아버지 말에 바로 대꾸를 하고는 방에 있던 책을 한 아름 가져다가 큰방 앞에다 쏟았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 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류시화의 잠언시집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고등학교 때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씩 하게 됩니다.
땅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영호가 김천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권씨네의 소작을 했습니다. 늦가을에 권씨네서 벼타작을 하고 밤늦도록 짚낟가리를 쌓는 것을 도왔습니다. 서늘해지는 밤이슬을 맞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300여 미터 떨어진 우리나라 지도로 치면 개마고원 쯤 되는 집까지 걸어오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가로등이 되어준 따뜻한 보름달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모두가 도란도란 정담을 나눌 때 영호 혼자 가로등을 달빛 삼아서 골목길을 걸으면서 그 옛날로 돌아가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소작을 하며 겸손했지만 당당했습니다. 영호도 단 한 번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5학년 때 아버지가 만들어 준 영호의 지게는 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겠다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부모님의 부지런함과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세 분 누님들의 헌신으로 집안 살림이 점차 나아지고, 영호와 남동생인 영규는 대학까지 졸업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인 며느리를 참 좋아했습니다. 아내도 부모님께 지극정성의 진심을 다했습니다.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하기 전에 손자인 광섭이가 태어났습니다. 80년대 농촌의 환갑잔치는 건강의 상징이자 약간의 자랑과 과시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교사이고 친손자까지 태어나니 부모님은 무척이나 좋아하셨습니다. 돼지를 네 마리나 잡고 환갑잔치를 했습니다. 3년 뒤에 손녀인 유정이가 태어났습니다. 시골집에서 몇 년 동안 3대가 함께 생활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천기저귀를 빠는 일에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광섭이가 감기에 걸려서 콧물을 많이 흘리니 천으로 닦으면 코밑이 짓무른다면서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당신의 혀로 콧물을 훔쳐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습니다. 사과농사, 자두농사, 벼농사, 밭농사 등으로 당신의 몸 돌보지 않고 지게질과 호미자루를 놓지 않았던 부모님은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잦아지고 큰 수술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습니다. 동생도 동분서주했습니다. 2000년 초반부터는 동생이 농사일을 하고 저도 주말에 거들었습니다. 그러다가 2021년에는 영호 혼자 30년 된 자두나무 100여 그루를 베고 새로운 농사를 위해 품종을 바꾸고 화양연화 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의 영호는 부모님의 평생 직업이었던 농사꾼이 되고 보니 당신들의 그 고단했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영호가 교장이 되는 것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야 교장이 되었습니다. 2019년 3월 2일 토요일에 부모님의 생전 바람처럼 오남매가 미리 모아 둔 돈으로 고향 마을에서 넉넉하게 잔치를 했습니다. 올해의 마을 경로잔치보다 더 큰 규모였습니다. 수건도 집집마다 한 장씩 돌렸습니다. 그리고 늘 유언처럼 말씀하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란 말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한결같이 고향집에 모여서 가족애를 나누는 누님들과 온갖 먹거리를 재배하고 푸근하게 나누는 인정 많은 동생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늘 저와 동행하는 아내 이영숙도 참 고맙습니다. 김치와 참기름, 60년이 지난 씨간장 등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김가네 맛꼬방입니다. 이 모든 게 부모님의 음덕입니다.
2022년 5월 8일 일요일 어버이날에 아내와 함께 부모님 산소를 찾았습니다. 산소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터를 잡았습니다. 고향집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그리 높지 않지만 볕이 잘 들고 멀리 김천의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이수 중의 하나인 감천과 석쇠불고기롤 유명한 배시내 너머까지 보이는 밭의 중간에 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평생 호미질과 괭이질을 하던 옥전에 합장으로 편히 잠들었습니다. 아내와 같이 절을 하고 준비해 간 꽃을 심은 뒤에 멀리 흐르는 감천을 보면서 나란히 앉았습니다. “여보, 당신 나이가 몇이야?” “이 사람이 새삼스럽게. 나는 작년에 환갑이었고 당신은 올해 환갑이잖아.”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 세월 참 빠르지.” “광섭이 낳은 해에 아버님 환갑잔치하고, 유정이 돌잔치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영호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돌려서 부모님 산소를 보았습니다.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