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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문화유산 가운데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할 수 없이 크다. 영남은 지역이 넓고 유교문화 역사가 깊어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온 지역이다. 경북은 고려 말에 영주 풍기(당시 지명 흥주)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안향)이 태어나, 제반 교육활동을 전개한 이래 많은 문사들이 문학작품을 수많게 낳아온 고장이다. 이들 문학에 대한 연구 성과는 방대하며 그 분량 또한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경북의 중서부 지역에 속한 김천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어떠한가. 김천의 역사는 2쳔 년-삼한시대 개령에 도읍을 둔 감문국(甘露國)과 조마에 있었던 주조마국(走漕馬國) 기준-이 넘기에 그 문학 유산 또한 방대하다. 김천문학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성되어 발달해 왔을까. 어떤 문학작품을 김천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김천 사람이, 김천인의 사상과 감정을, 김천의 소재로 표현한 문학이어야 할 것이다.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때에 이 고장에 김산현이 설치되고, 어모지방에 있던 금물현(감물현 또는 음달현)이 어모현으로 개칭, 지품천현이 지례현으로 개칭 되었다. 이 무렵에 김천문학이라 할 만한 문학작품은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조선이 개국 되고 1399년 4월 정종(영안대군, 공정대왕)이 함흥 영흥에 있는 자기의 태를 황악산 직지사 기슭에 안치하면서, 김산현이 어모현을 통합해 김산군(金山郡)으로 승격되었다. 별칭으로 금릉이란 지명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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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역과 지례객관을 지나며 시를 남긴, 고려의 문신 쌍매당 이첨(1345~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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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고려 중기 때 김천을 지나거나 우거하거나 또는 관리로 머물면서 남긴 문학 작품이 제법 전한다. 고려 중기(1174년 명종 때)에 예천 사람 임춘(林椿 호 西河 1154~1184)이 무신란을 피해 예천에 있다가 김산현 개령에서 이인로를 만나 남긴 시 「미수방여개령아리지주위향작시사지眉 訪予開寧鵝梨旨酒爲餉作詩謝之」가 있다. 충남 홍성 사람 이첨(李詹 호 雙梅堂 1345 고려 충목왕 원년~1405 조선 태종 5)이 김천역을 지나다가 쓴 시가 있다. 시 「과김천역過金泉驛」이다. 경남 고성 사람으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이원(李原 호 容軒 1368 고려 공민왕 17~1430 세종 12)도 시 「제개령문루題開寧門樓」를 남겼다. 그가 1408년(태종 8)에 경상도관찰사를 제수받고 개령을 지나다 문루에 올라 쓴 시다.
또한 고려 말에 충남 연기 사람으로 1356년(공민왕 5)에 서북면병마부사 그리고 판사재감사를 지낸 이사경(李思敬 호 送月堂 ? ∼ ?)은 고려의 국운을 감지하고 변란을 예상해 아들 다섯을 데리고 개령현 아포면 예동으로 내려와 공민왕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살았다. 그가 아포에 머물러 살 때 남긴 문학이 없을 수 없겠는데, 뒷날 아포읍 예동의 일신서원에 배향했지만 대원군 서원 철폐 때 서원이 없어지면서 작품이 소실 돼 볼 수 없다. 아포의 인동, 의동, 예동, 지동이란 동명은 그에 의해 지어진 동명이다. 이곳을 송월당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로구나.”라 했다. 목은이 「송월당기(送月堂記)」를 남겼다.
고려 말의 문관으로 해평 사람 윤진(尹珍 ?~1388 우왕 14)이 개령에 남긴 칠언절구가 있는데 아쉽게도 전·결 구가 소실돼 전한다(우준식, 『개령지』). 그는 1382년(우왕 8)에 판후덕부사 도지공거를 지냈으며 정당문학으로 승진, 1388년(우왕 14)에 문하찬성에 임명 되나 그해에 사망했다(금릉군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해다.
이렇듯 고려 시대까지는 김천 소재의 문학작품이 나왔지 진정한 의미의 김천문학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