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에는 두 개의 내가 있다. 하나는 직지천이고 하나는 감천이다.
직지천은 황악산 직지사에서 내려온다고 붙은 이름이다. 직지사가 유명하니 그 이름세가 강에까지 미쳤다. 직지천은 김천 시내를 남북으로 갈라놓으며 잠깐 흐르다가 감천에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증산, 대덕, 지례, 구성을 거쳐 김천의 동쪽 옆구리를 감싸며 선산으로 빠져나가는 감천은 말 그대로 ‘단내’, 달콤한 시내다. 물론 시냇물이 달콤한 건 아니다. 감천은 별로 큰 강이 아닌데도 개령, 감문, 아포에 걸쳐 있는 드넓은 벌을 홀로 감당하면서 선산 들판까지 적시고서야 낙동강으로 흘러드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달콤한 삶의 젖줄이다.
그러니 단내라는 말은 대상 자체만 가리키지 않는다. 가뭄에 애가 타 강바닥 후벼파는 농부의 단내나는 콧김, 큰물져서 들판 가득 범람한 황톳물을 속울음 삼키며 바라보는 아낙의 눈빛, 나락가마 둘러메고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서는 장정의 땀냄새, 풍년 들자 맘 탁 풀고 저승길 떠나는 감문 할배의 너털웃음 같은 것들, 삶의 온갖 애환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말이 단내, 감천이다. 단내의 맛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비리고 쓰고 아리며, 때론 맵싸하고 노릿하다.
끈적끈적 뒤엉킨 오감의 더껑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 단내를 단내로 만들었으니, 단내라는 말에서 달콤함이란 무수한 생애가 온몸으로 밀고 온 파란만장의 제유일 뿐 이다.
직지천은 말껍질이 곧 의미인 직설이지만, 단내는 외연과 내포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행복하게 교감하며 복잡 미묘한 아우라를 형성하는 은유다. 직지천에는 넓이밖에 없으나, 감천에는 높깊은 두께가 있다.
말에 민감한 시인은 직지천에 머무는 법이 없다. 당연히 그는 감천을 거슬러 오르거나 물길을 따라 내려가며 시에 이르는 비밀의 문을 찾는다. 사실 단내는 평범한 하천일 뿐이다. 이 땅의 장삼이사가 몸붙인 여느 곳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직지천도 가며실(부자마을, . 살림이 넉넉하다는 뜻의 ‘가멸다’에서 나온 말로 지역 사투리로는 흔히 ‘가매실’이라한다)앞들을 적시며 나락이 여물고 포도가 영글게 한다. 근본 구실은 감천과 직지천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시인은 직지천이 아니라 감천에 간다. 말이 다른 까닭이다.
직지천은 현상을 지시하는 말이지만, 감천은 존재의 본질을 품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감천이라는 사물이 존재의 비밀을 곧바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삶과 얽히고 말에 갇히면서 단내는 풍성한 이미지를 얻는다. 단내라는 이름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단내 너머까지 존재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단내의 이미지는 의미의 그릇 바깥으로 넘쳐흐른다. 실재하는 사물을 가리기는 객관성과 그 사물에 기댄 소소한 삶들의 주관성이 부딪치는 불협화음은 새청이 아니라 은은한 빛처럼 새어나온다. 시의 기미는 이런 곳에 있다.
흘러넘친 이미지의 빛이 일상에 갇힌 말들, 상투성의 굴레를 쓴말들의 캄캄한 감옥을 비추면, 말들은 서서히 몸을 뒤척이다가 갑작스레 요동치며 앞발을 높이 쳐들고 감옥문을 두드린다.
말들의 입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끓어올라 철책을 녹인다.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무너지는 말의 감옥, 감옥의 쇳덩이가 녹으며 뿜는 섬광, 빛의 파장을 따라 말들이 풀려나는 감미로운 소리, 소리의 결을 타고 새롭게 형성되는 의미망.
시인은 이렇게 신명나는 말들의 난장판 한 대목을 쓱싹 잘라낼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