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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대항면편(64)

편집국 기자 입력 2006.07.13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64)


▣ 대항면편


 


 


▷말무덤에서 유래된 마전(馬田)



봉산 구(舊) 검문소에서 직지사 방면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마전굴다리까지 직지천 좌우로 늘어선 마을이 복전1,2리인 마전과 복전이다.



연이어 접해있는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는 황간현 황남면에 속한 마전이었는데 지금의 복전1리인 마전을 하마전, 아랫마전이라 하고 2리를 상마전, 웃마전이라 했다.



이후 1906년에 황남면 파며면(芭?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에 상,하마전을 기날저수지와 궤방령 사이의 복산(福山)마을과 합하여 복산의 복(福)자와 마전의 전(田)자를 따서 복전동(福田洞)이라하여 김천군 봉산면으로 소속시켰다가 1973년에 대항면으로 편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전마을은 전의이씨(全義李氏)집성촌으로 조선 정조때 경남 의령에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던 전의이씨 24세손 춘영(春榮)과 은영(殷榮)형제가 궤방령 길목에 이르러 직지천변의 아름다운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한 이래 대대로 전의이씨 집성을 이루어 왔다고 후손인 마을주민 이종두(72세)씨가 전한다.



마전이라는 지명은 마을안쪽의 말무덤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임진왜란때 마을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죽은 왜병과 우리 군사들의 말을 들판 한가운데 묻어주고 돌을 쌓아 말무덤을 만들고 마을이름도 “말무덤이 있는 들”이란 뜻의 마전(馬田)으로 했는데 지난 1970년 경지정리때 이 무덤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마전마을 주민 이종두씨가 예전 말무덤이 있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충주박씨 집성촌 복전(福田)



복전1리인 마전과 인접해있는 복전마을은 아랫마을인 하마전과 구별하여 상마전으로 불리었고 인근의 복산마을과 함께 복전2리로 1971년에 분동했다.



복전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일제때인 1914년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웃마전으로 통했고 또는 말과 낙타를 뜻하는 마락(馬駱), 마라치라고도 했는데 이는 마을 앞 아랫양지산의 형세가 말 안장과 낙타의 등을 닮은 데서 연유되었다고 마을주민 박혜근(79세)씨가 전한다.



복전은 파평윤씨 집성촌인 복산과 함께 지금은 폐동된 말개미(마암), 넘바우, 안정골까지 아우르는 큰 부락으로 봉산면 태화리 봉명(가매기)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충주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인 15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1593))장군의 아들 3형제 즉, 사친(事親), 사군(事君), 사형(事兄)이 김천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부친을 쫓아 이 고장에 정착한 이래 일가를 이루며 집성을 형성한 것으로 복전에는 제3자인 사형의 후손들이 대대로 정착했다고 한다.



박이룡 장군은 조선 중종때 황간에서 성건(成楗)공의 차남으로 태어나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간으로 돌아와 의병을 모아 김천 하로,부상,개령,지례,방아재,우두령전투등에 참가하여 왜병을 물리친 의병장으로 이름을 드높혔다.



현재 대항면 세송, 직지사역 인근에 장군의 신도비와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장군의 신도비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손자이자 당대 명문장가로 알려진 영의정 정호(鄭澔 1648-1736)가 지어 더욱 유명해 졌다.



▷대항면 세송, 직지사역 아래 철로변에 있는 학촌 박이룡 장군 신도비와 비각


 


장맛비가 세찬 굳은 날씨임에도 안내에 흔쾌히 나서주신 충주박씨학촌공파 유사 박희영(62세)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선조가 한없이 자랑스럽지만 제대로 빛내드리지 못하는 것이 항상 송구스럽다며 신도비를 어루만진다.



장군의 신도비를 모신 비각은 세월의 풍상이 못내 힘겨운 듯 쓰러질 듯 푸른 잡초를 한가득 이고 있었다.



(다음호에 복전마을편 계속)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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