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曺偉)선생과 마암동(馬岩洞)
복전마을로부터 경부선 철로 건너편에는 지금은 폐동이 된 안정개라는 작은 부락이 있었는데 이 부락은 효종때 효행으로 출사하여 참봉벼슬을 한 안정(安定) 박사삼(朴事三)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안정공은 충주박씨(忠州朴氏)로 우암(尤唵) 송시열(宋時烈)이 평하길 “가례에 맞는 예절이 탁월하고 효행이 남의 본보기가 되었다”라고 칭송한 분이다.
복전마을에는 충주박씨 문중에서 자제교육을 위해 건립한 조천서당(藻川書堂)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확히 어느 시대에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이 우암의 글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서깊은 서당임이 분명하다.
마을주민이자 충주박씨 후손인 박혜근(79세)씨에 따르면 우암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에 불이 자주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을앞 직지천에 수초(水草)의 일종인 말(藻)이 많은 것을 보고 서당이름을 말조(藻)에 내천(川), 즉 조천이라 짓고 현판을 적어주고 같다고 하는데 그 이후 실제로 마을에 불이 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천서당의 우암 송사열 친필 현판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철도 터널옆으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철로 좌우로 넓게 펼쳐진 골짜기와 마암산(馬岩山)이 나오는데 일대에 옛날 마암동(馬岩洞)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또 옛날 마락사(馬駱寺)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마검, 말개미라고도 불린다.
이 골은 창녕조씨 종중산(宗中山)으로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선생의 묘소가 있음으로 해서 유명해졌다.
조위선생은 성종때 도승지를 역임한 명문장가로 홍문관 수찬으로 계실 때 당나라의 시성 두보(杜甫)의 시를 처음으로 언해하시니 이것이 두시언해(杜詩諺解)로 우리나라 고어, 고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492년에 매형(妹兄)이 되는 점필재,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집을 편찬하라는 성종의 명을 받고 점필제가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집에 수록하였다하여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유배를 당하고 순천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는데 동생 적암(適岩) 신(伸)이 이곳 마암산 선영에 모시었다.
마암산과 선생의 기구한 운명을 예언하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동생 적암(適岩)이 점을 치니 젬궤에 “千層浪裡 飜身出 也須岩下宿三宵“ 즉 ”깊은 물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아래서 3일밤을 잔다“는 것이다.
▷마암산 매계 조위선생의 묘소
모두들 이 예언을 두고 풀이를 하지못해 의아해 했는데 선생사후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하시어 시신을 묘소앞에 허뜨려 3일간 장사지내지 못하였는데 이로써 점장이가 말한 “바위밑에서 3일간 잔다” 는 예언이 적중하였다고 믿었다.
중종 반정후 선생의 죄가 사면되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지만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소실되어 오늘날 다 전하지 않음이 실로 안타깝다.
사림의 지도자로서 천재적인 문학혼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간 선생의 기구한 운명은 오늘날 작가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儒林)』에까지 이어져 정치 혁명가였던 주인공 정암(靜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입을 통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2001년 마암산 선영에 대한 보수공사때 모친인 문화류씨(文化流氏) 산소에서 매계선생의 친필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궂은 날씨임에도 흔쾌히 묘역안내를 자청해준 매계선생의 15대손 조지환(53세)씨는 쏟아지는 장맛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의 묘소에 난 잡풀을 연신 뽑는다.
전신을 비에 적시며 산을 내려오자니 저만치 철길너머로 마암재실이 거룩히 솟아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