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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대항면편(67)

편집국 기자 입력 2006.08.10 00:00 수정 0000.00.00 00:00

마을이야기(대항면편)

▷덕전3리 세송(細松)


  덕전3리로 속하는 세송은 조선시대까지는 황간현 황남면으로 속했었는데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터널을 사이로 마을이 아랫마, 웃마로 나뉘게 되고 다음해인 1906년 김천군으로 편입되어 대항면 관할로 들었다


  1914년 인근8개 부락을 합하여 덕전동이라 한 이후 1971년 세송마을이 덕전3동으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송마을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담양전씨(潭陽田氏)일가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당시 마을 주변으로 가는 소나무(細松)가 많아 마을 이름을 세송(細松)이라했다고 마을주민 김영진(70세)씨가 전한다.


  이 마을이 임진왜란후 마을이 크게 번성한 사정과 관련하여 당시 민간에 널리 신봉되던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송(松)자가 붙어있는 지명으로 몸을 피하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하여 이 마을이 임란당시 피난처로 각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일설에는 임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대패한 왜군이 겁을먹고 지명에 송(松)자가 붙은 마을을 피해 갔다는 소문이 돌면서 피난민이 몰렸다고도 전한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이 마을 뒷산에 직지사역이 서면서 마을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마을이 아래 윗마로 나뉘었을 뿐만 아니라 김천경찰서 대항면주재소가 역앞에 들어서는등 일약 대항면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세송마을 뒷산의 직지사역


 


  그런데 김천역과 추풍령 사이의 철로가 직선과는 거리가 먼 세송방면으로 비정상적인 곡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정과 관련하여 세송마을 일대가 명당인것을 간파한 일제가 의도적으로 혈맥을 끊기위해 철로를 우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즉, 세송마을에서 복전으로 넘어가는 갈밭골과 니릿고개 일대가 예로부터 갈대잎의 형상을 한 노화설(蘆花說)로 명산으로 알려졌고 때문에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철로를 우회하여 혈을 끊었고그 정점에 직지사역을 지었다는 것이며 그것도 모자라 니릿고개를 파헤쳐 길까지 냈다는 것인데 고개를 자르는 공사때 피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실제로 니릿고개 일대 흙이 붉은 찰흙이어서 흥미를 더하고 있다.


 


▷덕전4리(왕대(旺大),신평(新坪))


  세송마을 아래에 위치한 왕대마을은 1867년 안씨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직지사를 다녀가던 한 고승이 마을중앙에 큰길이 있으면 마을이 망하게 된다하여 마을의 큰길(마을에서 대룡초등학교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은 후 마을이 크게 번성했다하여 마을이름을 성할 왕(旺)자에 큰대(大)자를 써서 왕대(旺大)라했다고 마을주민 최의창(60세)씨가 전한다.


  왕대마을 변창섭씨 집뒷산에는 선산김씨 수민(秀敏)공의 묘소가 있는데 우람한 석상이 있음으로 해서  장군석으로 불리었는데 확인한 결과 문인석이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다고 한다.


  왕대마을과는 니릿고개로 연결되는 도로하나를 사이로 마주하고있는 신평마을은 왕대와 함께 덕전4리로 속하는데 1870년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후손들이 지금의 신평마을 아래를 일컫는 덕국에 정착해 살기 시작하고 뒤이어 선산에서 김해김씨 일가가 들어와 넓은 들판에 새로 마을이 들어섰다하여 신평(新坪)이라 했다고 마을이장 김성수씨가 전한다.


  신평은 예로부터 하천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는 용복마을과 줄다리기를 해왔는데 1932년 군중이 모이는 것을 경계한 일제에 의해 금지된 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지난 2001년 김천문화원의 지원으로 매년 단오절에 맞추어 마을 대항 줄다리기를 벌려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신평리, 용복리 마을 주민 대상 줄다리기 광경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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