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소면편
▷월곡리(밤실,용시)
월곡리(月谷里)는 밤실, 용시, 남곡, 못골등 크게 4개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조선시대까지는 개령현 농소면 율곡동으로 속했었는데 1914년에 밤실과 용시, 남곡, 못골을 합해 월곡동이라 고치고 1971년에 4개동으로 다시 나누었다.
월곡1리인 밤실은 국도4호선 변에 위치한 농소면의 소재지로 암소가 산 정상에서 새끼를 낳았다 하여 길지로 꼽히는 소대산 아래의 자리한 큰 부락이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1510년에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22세손 선호(善好)라는 분이 경남 의령에서 이주해 지금의 밤실마을에서 용암방향으로 수백미터 위쪽, 일명 소대산 아래 (현 박위태씨 소유 자두밭 일대)에 정착한이래 대대로 밀양박씨 집성을 이루어왔고 이후 1720년 개령면 황계에서 김해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 22세손 종기(鍾夔)란 분이 이주해오면서 김해김씨도 집성을 이루게 되었다고 마을이장 박인범(53세)씨가 전한다.
▷초창기 마을이 있던 소대산 아래 집터
밤실 또는 율곡(栗谷)이라는 마을의 지명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뒷산인 소대산에 야생밤나무가 많아 밤실 또는 밤율(栗)자를 써서 율곡이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의 마을이 위치했던 윗밤실은 1936년 병자년 수해때 율곡천의 범람으로 유실되고 지금의 마을위치인 아랫밤실로 집단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때 윗밤실에 살던 박희중(朴喜重)이란 분이 지금의 면사무소가 위치한 자리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는데 작은 냇가를 넘어가 살았다하여 월천동(越川洞)이라 했는데 점차 양마을 사이에 집이 들어서면서 밤실로 한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앞으로부터 용시를 지나 신촌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있는데 1964년 전국에서 최초로 경지정리를 실시한 곳으로 준공식때 박정희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밤실로부터 국도를 넘어 아포방면으로 따라가다 보면 삼태봉(三台峰)아래에 자리잡은 월곡2리 용시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 개령현 농소면의 14개동을 관할하던 면사무소가 1906년 밤실로 이전되기 전까지 이 마을에 있었을 만치 농소면의 중심 부락이기도 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운 경주이씨 정용(正用)이란 분이 1521년(인종7년) 이 마을로 낙향한 이래 대대로 경주이씨 집성촌을 이루어왔다.
용시라고 하는 마을의 지명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예부터 일대농경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된다하여 농소(農所)라한 것이 음이 변하여 용시가 되었다는 것인데 현재의 농소면이 라고 하는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 뒷산 삼태봉이 용(龍)의 형상이라 용이 머무는 곳, 즉 용소(龍所)라 했는데 역시 음이 변해 용시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김경수(75세)씨를 비롯한 마을주민 대부분은 후자인 용과의 관련성을 믿고 있었는데 삼태봉을 용으로 여겨 무단으로 벌채나 시신매장, 토사채취 등 삼태봉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동을 주민 동의 없이 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었고 청룡끝이라 불리는 지점에 1930년 전주민이 동원되어 흙을 날라 토성을 쌓고 나무를 심어 북풍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을 보완해 마을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막았다고 마을 이장 이삼용(62세)씨가 전한다.
▷삼태산 끝에 인공으로 쌓은 토성
밤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앞들도 1964년의 경지정리 때 앞들 대부분이 혜택을 입었는데 당시 마을이장으로 농지정리 추진위원장을 겸했던 김경수씨는 미군과 국군 공병장비들이 마을에 상주하며 공사를 펼치던 장관과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한 손을 일주일간 씻지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