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감문국의 도읍지 개령
김천시내에서 선산방면으로 감천을 따라 좌측으로 삼각형태로 펼쳐진 개령면은 예부터 감천의 풍부한 용수와 비옥한 토질을 바탕으로 지역의 대표적인 곡창지로 알려져 왔으며 감문국의 옛 도읍지이자 개령현의 소재지로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간직한 역사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등의 사료를 종합해 볼때 지금의 개령면 동부리와 양천리 일대를 중심으로 개령면과 감문면일대를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감문국은 그 전신이 삼한시대의 변한계열 12국 가운데 하나인 감로국(甘路國)인데 일찍이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하고 가야와 백제를 견제하려던 신라에 의해 231년 토멸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개령일대에는 감문국 왕비의 능(陵)으로 추정되는 장부인릉과 감문산성, 궁궐터와 연못 등이 180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김천의 고대역사를 말없이 증언해 주고있다.
삼국사기 신라조 조분왕 2년 7월조에는 “以伊찬昔于老爲大將討破甘文國以其地爲郡” 즉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사벌주아래의 감문군으로 있다가 진흥왕18년(557년) 감문주, 문무왕 원년(661년) 감문군, 경덕왕16년(757년) 개령군으로 개편된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조선조에 들어 태종16년(1416년) 개령현으로 격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는 왜군 제7진 3만명이 개령에 진주해 후방사령부를 설치한 관계로 많은 현민이 고통을 당했고 임란직후인 1598년에는 개령현 아포출신 길운절이 제주도에서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인근 김산군에 폐합되기도 했다.
1896년 개령군이 되었다가 1914년 개령군에 속한 부곡면과 서면이 합해져 개령면으로 개편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계리(황경골,오송골)
황계리는 용두동에서 선산으로 이어지는 910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만나는 개령의 첫 마을로 황계1리인 황경골과 2리인 오송골로 이루어진 두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에 속해 황경동(黃京洞)이라 했는데 1914년 서면과 부곡면이 통합되어 개령면으로 될 때 인근의 오송을 합해 황계동(黃溪洞)이라 고친 후 오늘에 이르고있다.
지명과 관련해서 황경, 횡강, 황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비옥한 황토가 많은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누를황(黃)자에 클경(京)자를 써서 황경(黃京)이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에서 볼 때 감천이 가로로 누워 흐른다하여 횡경(橫京), 또는 감천을 빗대어 흙탕물이 흐르는 시내란 뜻의 황계(黃溪)로도 불렸다.
황경골은 160호에 달하는 개령최대의 부락으로 마을이 처음 형성된 것은 김녕김씨 김문기(金文起)선생의 9세손인 응남(應南)이란분이 임진왜란을 피해 지례에서 이곳으로 이주하고 이후 형조참판을 역임한 김해김씨 16세손 명한(命漢)공이 1805년 이 마을로 입향한 이래 대대로 김녕김씨와 김해김씨가 집성을 이루어왔다.
이 마을은 화산과 치봉골등의 야산이 마을을 포근이 감싸고 있어 밖에서는 마을이 드러나지 않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자손이 번성하고 부유해진다는 명당터로 널리 알려져 왔다.
마을주민 김진영(73세)씨에 따르면 현재의 대홍아파트로 부터 어모천이 합류되는 일대까지 감천변에 드넓게 펼쳐진 “번개(蕃溪)들”은 원래 갈대밭이었는데 1800년대말 개간을 통해 경작지로 조성이 되었는데 비옥한 사질토로 인해 예부터 무와 배추의 주산지로 유명해 조선말 궁중에까지 진상이 되었고 1970년대 초까지 전국의 채소중개인들이 몰려들어 마을앞 주막거리가 흥청거렸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전국적인 채소 산지로 명성을 얻었던 번개들을 마을주민들이 안내하고 있다.
황계마을 입구와 번계들 사이의 주막이 있던 자리는 옛날 감천물이 드나드는 냇가바닥 이었다하여 구내(舊川)주막으로 불리는 주막걸이 있었는데 지금은 큰 도로가 새로 나면서 옛 주막은 간데없고 부동산 업소가 이방인을 맞는다.
황계2리 오송골은 모광지 옆 오송골 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데 이산에 큰 소나무 다섯그루가 있다하여 오송(五松)이란 지명을 얻었다고 하며 임진왜란때 소나무 송(松)자가 붙어있는 곳으로 피난하면 안전하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