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1리(교동,옥전동,정변동)
동부리는 옛 감문국으로부터 조선시대 개령현에 이르기까지의 읍치(邑治)로서 감문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교동, 옥걸이, 정변동 등 크게 세 부락으로 구성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부곡면에 속한 교동, 옥전동, 정변동이었는데 1914년 개령현이 개령면으로 되면서 세 부락을 통합하여 면사무소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부동(東部洞)이라 하였다.
교동(校洞)은 교촌, 윗마을, 윗곡, 조동 등으로도 불리며 개령향교가 있는 위쪽의 마을로 뒤로 호랑이의 머리와 등에 해당한다는 호두산(虎頭山)과 맞은편에 관학산(觀鶴山)사이에 자리잡고있다.
개령향교는 1473년(성종4년)에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서부리 사자사(獅子寺)를 헐어 그 목재로 유동산 아래 감천변에 창건했는데 감천의 범람으로 동부리와 양천동의 경계인 관학산 자락에 1609년 옮겼고 1866년에 다시 현재의 감문산으로 이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마을주민들 사이에서는 향교의 감문산 이전과 관련해서 서애(西厓) 유성룡의 후손인 우의정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 1798-1875)선생이 자신의 묘소를 들이기 위해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때 다분히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유정승이나 그 후손이 유학의 지방본산인 향교를 사익을 위해 함부로 이건시켰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기 어려우며 1989년 향교대성전을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에 1610년과 1866년에 걸쳐 두번 옮겼다는 기록을 통해 볼때도 선생이 졸(卒)한 연대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관학산 명당으로 알려진 좌의정 유후조 선생의 묘소
또 동부리 관학산에는 내신정(來新亭)이라는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우리고장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약소(鄕約所)로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던 향촌자치기구로 명성을 얻었으나 지금은 잡풀에 묻혀 옛 면모를 찾을 길이 없다.
또 마을뒤로는 삼성산 자락에 천년고찰 계림사(鷄林寺)가 있는데 이 절은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서기419년(신라눌지왕3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설에는 계림사가 위치한 호두산이 풍수지리설로 볼 때 기운이 너무 세어 맞은편 아포 대신마을에 살상(殺傷)의 기운이 뻗치는지라 그 기운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을 천마리나 길렀다는 것.
그런데 그 닭조차 수시로 폐사하는지라 궁여지책으로 절 이름을 닭이 숲을 이루어 산다는 뜻의 계림사(鷄林寺)로 고치고 닭 기르는 것을 대신했다고 한다.
▷계림사와 개령향교가 자리한 감문산 전경
계림사뒤로는 감문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해발 3백미터의 취적봉이 있는데 감문국시대에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때 이곳에 올라가 나팔을 불렀다하여 불 취(吹)에 피리 적(笛)자를 써서 취적봉(吹笛峰)이라 했다고 하며 또 변란시에 봉화불을 올렸다하여 일명 봉화산(烽火山)으로도 불린다.
감문산에는 예로부터 무덤이 없기로 유명한데 이는 감문산에 묘를 들이면 개령지서 앞 쌍샘물이 뒤집어진다는 속설 때문인데 마을주민 김종태(75세)씨는 실제로 이런 경우를 목격했다고 한다.
옥전동 또는 옥거리는 교동아래의 초등학교옆 부락으로 옛날 개령현의 옥(獄)이 있었던 지역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며 정변동은 옥동에서 동부2리 舊교동과 접해있는 방면으로 이곳에 큰 샘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현재의 개령면 사무소와 지서, 개령초등학교 등 관공서 터는 옛 개령현의 관아터로 당시의 연못이 면사무소앞에 그대로 남아있으며 원래 서부리앞 남산 정상부에 있던 개령의 명물 팔승정(八勝亭)이 舊한말 현재의 면사무소앞으로 이전된 뒤 “접근금지” 천을 두른채 위태로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