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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개령면편(6)

편집국 기자 입력 2006.11.30 00:00 수정 0000.00.00 00:00

  ▷관학산 명당터 동부2리(구교동)


 


  동부1리 교동과는 수로로 이용되고 있는 굴다리를 사이로 경계를 이루고 또 양천리와는 말고개와 경계를 이루며 유동산과 관학산 사이에 위치한 동부2리 구교동을 찾았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개령현 부곡면 동부동에 속해있다가 1971년 구교동이 동부2동으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부2동은 원래 단양우씨(丹陽禹氏), 양천허씨(陽川許氏), 성산배씨(星山輩氏)가 집성을 이루고 있었는데 해방이후 단양우씨와 양천허씨는 점차 타처로 떠나고 남아있지 않다.


  구교(舊校), 구교동(舊校洞), 교천(校遷)이라는 마을의 지명들은 개령향교가 1610년부터 1866년까지 250년간 이 마을에 있었음으로해서  얻게 된 지명으로 구교와 구교동은 옛 향교가 있던 마을이란 뜻이며 조천은 향교가 옮겨졌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향교가 있었던 위치에 대해서 마을주민들은 관학산 유후조(柳厚祚(1798-1875. 좌의정역임)선생의 산소자리라고 알고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비춰 볼때 향교는 마을앞 농경지 일대에 있었을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 마을을 조천이라 부르는 것은 교천의 변음(變音)으로 보이며 특별한 의미는 없는 듯 하다.


  이 마을은 관학산을 배후로 양천리와 함께 감문국시대 궁궐이 있었던 중심으로 보고 있는데 실제로 구교동과 양천리의 경계인 말고개 정상부 육종철씨 집에 1969년까지 궁궐초석으로 전해지는 다듬은 돌이 여러개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대문앞에 일부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교동과 양천리의 경계인 말고개.
   고개정상에 감문국시대 궁궐의 초석으로 전해지는 바위들이 있다.


 


  또 마을앞 유동산옆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1934년에 간행된향지(鄕誌)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에 이 못을  동부연당(東部蓮堂)이라 하여 감문국 시대 궁궐에 딸린 연못으로 적고 있다.


 


 


 


 


 


 




 


  ▷감문국시대 궁궐연못으로 알려진 유동산 아래 저수지


구교동의 관학산은 감문산의 취적봉 줄기가 백호와 청룡을 이루며 뻗어내리다 그 혈맥이 맺힌 천하명당으로 꼽히는데 그러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름난 대부호(大富豪)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그중에 대표적인 집안이 양천허씨와 단양우씨 집안으로 특히 1954년부터 59년까지 대법관을 역임한 허진선생의 출생지로 관학산자락 1800여평의 대지에 1790년 건립된 정원집(庭園宅)은 원래 안채,사랑채,곳간,행랑채,문간채로 이루어진 ㅁ자형의 대저택이었는데 지금은 정원수 몇 그루와 주춧돌들만이 남아 옛 위용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수백년은 족히 됨직한 멋들어진 소나무가 이방인을 맞는데 그 뒤로는 단정하게 다듬어진 안채의 기단석과 용도가 다한 주춧돌이 가득 쌓여있고 관학산 기슭을 따라 산 전체를 정원으로 꾸며놓은 지난날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마을이장 배현(45세)씨에 따르면 1970년대초까지만 해도 후손이 살면서 관리를 해 대저택의 면모를 유지했고 갖가지 정원수와 꽃들로 가꾸어진 개령의 명물이었다고 전한다.


 


 


 




 


  ▷양천허씨 집안의 대저택이 있던 관학산 아래의 정원 집터


 


  또 이웃에 자리한 단양우씨 집안의 우상학(禹象學.1864-1942)선생의 대저택도 이제는 집터만이 남아 덧없이 흐르는 감천을 굽어볼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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