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리(楊川里)
조선시대에 개령현 부곡면으로 속했던 양천리는 동쪽으로 감천, 서쪽으로 감문산 취적봉이 가로막고 남쪽으로는 말고개를 경계로 동부2리 구교동과 북쪽으로는 광천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되어 1895년 폐지된 양천역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볼때 일찍이 역촌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역 주변에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은 밀양박씨 성상(成相)이란 분이 영조때 입향하면서부터 밀양박씨가 집성을 이루기 시작했고 뒤이어 김해김씨와 김녕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양천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 감천변에 수양버들이 장관을 이루어 버드나무 양(楊)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양천(楊川)이라 이름했다고 전하며 지금도 유동산 아래 도로변에는 몇 그루의 버드나무 고목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역말, 역마을로 불리는 것은 과거 역이 있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다
이 마을에 있었다는 양천역(驛)은 김천도(金泉道)에 딸린 남면 부상역, 구성 작내역, 삼락동 문산역, 대덕 장곡역과 함께 우리고장에 소재했던 5개의 역중 하나였다.
▷1750년 초에 간행된 「광여도」개령현 부분지도.
양천역의 위치가 뚜렷이 남아 있다.
과거의 역은 봉수대를 관리하고 공문서의 전달과 공무자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며 국가의 물품 수송, 신구(新舊) 수령의 영접,내빈 접대등의 임무가 주어진 오늘날로 치자면 교통과 체신을 전담하는 특별행정 기관이었다.
관련자료에 따르면 양천역에는 중마(中馬)2필, 소마(小馬)3필, 역리(驛吏)33인, 사창(社倉)1칸, 전답(田畓)43결이 역에 딸려있었다고 하며 당시 역은 현재의 마을회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지금은 당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역이 소재했던 양천리 전경
다만 동부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를 일컬어 역말 또는 말고개라 하고 관용숙소였던 동원(東院)이 있던 곳을 원터라 하는역과 관련된 일부 지명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마을은 동부리와 함께 고대국가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감문국과 관계된 지명과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성안골(城內谷)과 진대골(陳大谷)이 대표적이다.
성안골은 마을뒷산인 감문산의 골짜기로 옛날 감문국시대에 이곳에 성을 쌓고 살았다 하는데 마을주민 박준규(70세)씨와 박대연(55세)씨에 따르면 30여년전 까지만해도 운동장크기는 족히 됨직한 공터와 주변 성곽의 형태가 뚜렷이 남아있었고 전한다.
또 진대골은 마을앞 감천변, 옛 빨래터 일대를 일컫는 곳으로 감문국시대에 군사들이 일대에서 진영(陣營)을 펼치고 조련을 했다하여 진대골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1967년 발굴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바있는 양천리고분이 있는데 당시 삼국시대의 투구와 칼이 출토되었고 석실내부에 채색의 흔적이 보이는 문양이 있었다고 한다.
▷양천리 고분
발굴조사 이후 40년 가까이 방치된 관계로 잡목이 한참을 우거져그나마 녹슬은 안내판 마저 없었더라면 차마 고분의 형채를 알아볼 수도 없었으리라.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