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이어지는 국도 4호선의 좌측으로 나뭇잎과 비슷한 형태를 띄고있는 남면은 법정10개동에 32개의 크고작은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는 금오산을 기준으로 구미시와 칠곡군, 아포읍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농소면, 남쪽으로 성주군 초전면, 북쪽으로는 구부린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나와 감천(甘川)을 경계로 개령면과 마주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볼때 면의 동쪽으로는 금오산과 제석봉, 남서쪽으로는 영암산과 백마산등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북쪽으로 가면서 율곡천과 연북천, 월곡천을 따라 넓고 기름진 평야지가 전개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남면은 줄곧 개령현 관할로 속했는데 조선시대까지 옥산, 봉천, 오봉, 초곡, 운남, 용전이 개령현 적현면(赤峴面)으로 속하고 송곡, 운곡, 월명이 남면(南面)에 해당하는 2개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914년 적현면과 남면을 통합하여 남면으로 하고 1916년에 운남동 종상에 있던 적현면사무소를 옮겨 옥산으로 이전했다.
또 불교와 교통의 중심지로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은 폐사가 되었으나 서기 750년경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되어 국가적인 비호를 받으며 대가람으로 성장, 금오산일대 최대 화엄사찰로 유명했던 갈항사로 인해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졌고 고려시대 부상에 역이 설치되면서 부상역이 성주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가 되기도 했다.
최근 이웃한 농소면의 고속전철 역사건립 확정에 이어 남면 용전리와 운남리, 옥산리 일대가 혁신도시건설 예정지로 발표되면서 앞으로 수년내에 신도시로 면모를 일신할 것으로 보여 어쩌면 다시 못 볼수도 있는 일대의 풍경이 더욱 정겹다.
□옥산1리(옥산. 玉山)
옥산은 국도 4호선으로부터 안쪽 송곡천을 지나 운남산 아래에 자리잡은 남면소재지 마을로 조선시대까지는 개령현 적현면 옥산동이었는데 1914년 인근의 지산과 석정을 합하고 1916년 운남동 종상에 있던 면사무소가 옥산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1971년 옥산이 1, 2동으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 일가가 맨 처음 입향해 마을을 이룬 것으로 전해지는데 옥산이라는 동명은 조선시대 중엽까지 이곳에 개령현에서 관할하며 죄인을 가두었던 감옥(監獄)이 있음으로 해서 얻게된 지명인데 조선말 옥(獄)이 없어지면서 뜻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구슬옥(玉)자로 바꾸어 옥산(玉山)으로 했다고 전한다.
면사무소에서 농남중학교를 지나면 석정과 초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지점(현재 수원백씨 종중산)에 길게 걸쳐있는 야산이 바로 옥(獄)이 있었던 산(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은 두갈래 길이 나면서 잘리고 밭으로 개간이 되어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도 몇몇 주민들은 이 산을 일컬어 옥산(獄山)으로 칭하고 있었다.
▷면소재지 마을의 지명유래가 된 옥산
□옥산2리(지산. 池山)
옥산으로부터 농남중학교를 지나 운남리 석정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보이는 마을로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적현면 지산리였는데 1914년 남면 옥산동으로 합해졌다가 1971년 지산을 다시 옥산2동으로 분동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평택임씨(平澤林氏) 전적공파(典籍公派) 집성촌으로 판결사(判決事) 벼슬을 한 임흥주(林興籌)란 선비가 1500년대말경기도 여주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 개척한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도 지좌동 호동마을과 함께 우리고장 최대의 평택임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동명인 지산(池山)은 마을앞에는 못(池)이 있고 마을뒤에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山)이 있다하여 붙혀진 지명으로 못과 산이란 뜻으로 모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옛날 갈항사 스님이 마을을 지나가다 자손대대로 번창할 명당이라 하며 지금의 마을자리를 잡아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산마을의 지명유래가 된 마을앞 저수지
<글/김천문화원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