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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남면편(마을이야기 94)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3.15 00:00 수정 0000.00.00 00:00

 


 ▷오봉2리(갈항,시집매,쇠바태이)


  1919년 봉곡,오수와 합해져 오봉동이라 했다가 1971년 갈항,시집매,쇠바태이등 세 부락이 오봉2동으로 분동된 금오산 서편에 위치한 마을이다.
갈항마을은 갈항사(葛項寺)라는 절이 있음으로해서 얻은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주변에 칡(葛)이 많았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갈항사는 신라 경덕왕 7년인 서기 748년 왕실의 지원으로 승전대사(勝詮大師)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현재 절터의 보호각에는 보물 제245호인 석가여래좌상과 맞은편에 비로자나불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승전이 상주영내의 개령군에 절을 짓고 돌맹이 80여개를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연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갈항사는 원래 인근 금오산 약사암과 칠곡 북삼의 굴암사를 암자로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소된 후 1900년대 초까지 석가여래좌상의 두상만이 노출된 상태로 매몰되어 있던 것을 주민들이 발굴하여 초가집을 지어 봉안해오다가 1978년에야 현재의 보호각이 세워졌다.


 


 


 


 △보물 제245호 갈항사 석가여래좌상


 


  주변에는 우물과 축대, 초석, 기와파편 등이 산재해있으며 탑지(塔址)의 위치로 볼 때 현재의 보호각 자리에 금당(金堂)이 있었으며 갈항사의 창건을 전후한 시기에 즉위한 원성왕이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화엄종 교단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또 창건주 승전대사가 신라  화엄종의 고승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당초 금당에 모셔졌던  불상은 화엄종에서 주불로 모시는 맞은편 비로자나불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보호각 앞 자두밭의 쌍탑이 있던 지점에 동,서탑의 원위치를 표시한 표석이 서있는데 1916년 6월에 일본 금석학자들이 탑의 건립연대를 기록한 명문(名文)이 명확하게 새겨진 쌍탑의 가치를 간파하고 같은 해 2월에 있었던 도굴사건을 핑계로 안전하게 관리한다는 미명아래 서울경복궁내 총독부박물관으로 이전해 버렸다.


  광복직전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인천까지 옮겨졌다가 패전으로 실패하고 부둣가에 방치되다가 광복후 1962년 국보 제 99호로 지정되어 경복궁내 국립박물관으로 다시 이전되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 용산 국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두 탑이 나란히 섰다.


  동탑(東塔) 기단부의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妹三人業以成在之( )者靈妙寺言寂在思旅( )( )姉者照文皇太后君( )在旅( )( )妹者敬信大王( )在也” 즉 “경덕왕 17년에 원성왕의 생모인 박씨와 원성왕의 이모, 외삼촌 언적 등 3인의 발원을 이 탑을 세웠다” 라는 명문을 통해 우리나라 석탑중 유일하게 탑의 조성연대와 경위가 명확하게 밝혀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두문자가 사용된 점등이 확인되어 1962년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용산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제99호인 갈항사 삼층석탑


갈항마을 아래에는 1930년대 마을이 형성된 씨집매라는 마을이 있는데 당시에 손씨, 백씨, 강씨등 세집만 살았다하여 삼가(三家),또는 세집마라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씨집매, 새마을로 불린다.


  씨집매 안쪽 금오산아래에는 쇠바탱이,쇠마당,우장(牛場)등으로불리는 또다른 작은 부락이 있는데 옛날 금오산성을 보수하거나 군수품을 운반할 때 이 마을까지는 소로 운반하고 여기서부터 산성까지는 사람이 등짐으로 지고 나르면서 몰고 온 소는 이곳에 매어두고 갔다하여 부쳐진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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