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54)
대덕면편
▷문의리(임터, 아랫임터, 꼭두바위, 기린마)
경상남도 거창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문의리는 기린마,임터,꼭두바위 등 크게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례현 남면 문의, 임기 등으로 불리다가 1895년 외남면, 1914년 인근의 꼭두바위, 아랫임기를 합하여 문의리(文義里)로 지명을 바꾸어 대덕면으로 편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도 3호선 변에 위치한 임터는 문의리의 중심마을로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풀임(林)자에 터기(基)자를 써서 임기(林基)라 적고 임터라 했다고 한다.
임터 아래로는 아랫임터로 불리는 마을이 새목골물과 화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로 마을앞에 굽은 바위가 놓여있어 굽을곡(曲)자에 바위암(巖)자를 써서 곡암(曲巖)이라 적고 꼭두바위라 했다는 곡암마을이 도로변에 남아있다.
곡암마을은 수년전 수해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가 도로 직선공사로 마을이 두 동강이 나면서 마을의 형태가 많이 훼손되었고 마을의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꼭두바위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국도3호선변에 자리잡은 임터마을 전경
임터에서 우측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길을 한참 들어가면 원문의, 내촌, 기림마등으로 불리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인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오지였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있는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집성마을로 국사봉으로 오르는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하여 내촌(內村)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원래의 문의마을”이란 뜻의 원문의(元文義)로도 불렸다.
문의라는 마을지명은 평산신씨와 파평윤씨 등 명문가의 자손들이 국사봉아래로 깊숙이 들어와 살면서 선비의 기개와 유학을 대표하는 문(文)자와 의(義)자를 따서 마을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기린마 라는 지명은 “건너편에 마을”이라는 뜻의 사투리로 보인다고 마을이장 이상술(57세)씨는 전한다.
기린마 앞산은 성재(城峴)로 불리는데 전해지기를 임진왜란때 나라에서 마을주민들을 동원해 성을 쌓을 때 여동생이 치마에 돌을 나르고 오빠는 돌을 쌓다가 성을 다 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치마에 싼 돌을 버렸더니 큰 돌무덤이 생겼다고 하며 이후 그 성을 일컬어 여성(女城), 치마성 등으로도 부른다고 한다.
△기림마주민들의 애환이 서린성재.
또 기림마 뒷산인 국사봉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등 이 마을 일대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는 기림마 마을뒷산인 국사봉
마을을 둘러보고 내려오다 성재 길목에서 만난 한 주민은 경상북도에 있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경상남도에 있는 포도밭에서 일을 한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주민이 일러 준대로 마을을 빠져나오고 보니 경남 거창군 한기리 마을을 거쳐 거창땅 국도로 접어든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