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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증산면편(유성1.2리)

관리자 기자 입력 2008.07.03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 마을이야기(157)
증산면편


▷유성1리 옥동- 지난호에 이어 계속


 천년의 세월을 이겨온 쌍계사는 1951년 7월14일 북한군들의 방화로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당시 불타는 쌍계사를 목격했다는  한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스무시간을 넘게 탔다고 한다.


 현재 대웅전 주춧돌과 배례석, 부도 등 일부석물이 남아있으며 이를 목격했을 또 다른 증인인 소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린 채 서있다.
또 직지사 경내 성보박물관에 “쌍계사”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동종이 남아있고 당간 지주석과 대형맷돌은 사연은 알수 없으나 인근 증산중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있다.


 이때 소실된 대웅전은 그 규모가 웅장하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인근 동리의 장정들이 돌팔매질 내기를 하여 지붕을 넘기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도 하고  대웅전내의 후불탱화 4폭이 특히 유명했다고 하며 한창 쌍계사의 사세가 좋을 때는 스님이 1000명이 넘어 밥 짓는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성주군 금수면 영천동까지 흘러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성2리(버들밭柳城 . 지소紙所)


 유성2리는 버들밭으로 불리는 유성과 지소 등 두 마을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두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 1895년 성주군 내증산면,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으로 속하다 1914년 옥동,유성,지소가 유성리로 통합되고 1973년 유성,지소가 유성2리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동에서 백천교를 넘어 목통천변에 자리한 버들밭은 임진왜란때 황상원(黃相元)이란 선비가 피난을 와서 정착해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버들밭이라는 지명은 당시 마을앞에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를 개간해 밭을 일구었다하여 마을이름을 버들밭이라 하고 또 버드나무가 성곽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하여 버들유(柳)자에 성성(城)자를 써서 유성(柳城)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 뒤에 증산면소재지가 유성1리 옥동으로 정해진 뒤 유성리로 속하는 인근마을들의 본디마을이란 의미로 원유성(元柳城)이라고했다고도 전한다.


 아래의 지소마을은 예부터 한지를 생산하는 장인촌으로 유명했는데 처음에는 이웃한 쌍계사를 중심으로 사찰에만 공급하다가 그 품질이 좋다는 평판이 나면서 조선시대 말까지 나라에 공물로 공급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가천변에 아름답게 자리한 지소마을전경


 지소(紙所),지촌(紙村)등 종이 지(紙)자가 마을지명에 들어간 것이 이같은 연유에서 비롯되었는데 수도계곡일대에 자생하고있던 풍부한 닥나무와 대가천의 맑은 물이 양질의 한지를 생산할수있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동안리 증산중학교 교정에는 이후취원지소선정비(李候쫛原紙所善政碑)가 섰는데 이 비는 원래 지소마을앞에 세워져 있던것을 오래전 수해로 유실되었다 발견되어 학교교정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한지생산지로서 지소마을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선정비


 이 비에 대한 정확한 내력을 알길은 없으나 이취원(李쫛原)이라는 관리의 지소마을에 대한 은혜에 대해서 병방, 공방, 호장, 이방, 도감 등의 아전들이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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