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65)
증산면편
▷황정리(黃亭里)
원항정.봉산.새뜸.바람재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증산면으로 속하여 황정, 봉산, 고동으로 불렸는데 1895년 내증산면이 양분되면서 성주군 내증산면이 되고 , 1906년 지례군 내증산면이 되었다가 1914년 원항정, 봉산, 새뜸을 합해 황정리라 했고 1936년 병자년 수해때 수재민이 새뜸에 정착해 마을을 이루어 이들 4개동이 현재의 황정리가 되었다.
▲황정마을 전경, 마을 뒤로 성주군 금수면으로 넘어가는 꼬부랑재가 있다.
황정리는 동쪽을 성주군 금수면, 서쪽으로 동안리, 남쪽으로 유성리, 북쪽으로 황항리에 접해 있는 마을이다
원황정마을은 조선중엽 성산이씨 이형진(李亨進)이라는 분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앞 소나무숲에 정자를 지었는데 노란꾀꼬리가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하여 누를 황(黃)자에 정자정(亭)자를 써서 황정(黃亭)이라 했다고 마을 전이장 피교필(55세)씨가 전한다.
▲동명의 유래가 된 마을입구의 솔숲. 옛날 이 소나무 숲에 정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황정마을입구에서 우측으로 수백미터 안쪽으로 자리잡은 봉산마을은 인동장씨 집성촌으로 마을입구에 수령 5백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있어 큰새가 자주 날아왔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를 써서 봉산(鳳山)이라했다고 알려진다.
▲봉산마을입구를 지키는 정자나무
황정마을의 왼편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천상봉 산자락에 바람재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지대가 높아 바람이 게세어 바람재 또는 풍령(風嶺)이라는 동명을 얻었는데 지금은 3가구만이 남아있다.
황정과 봉산마을사이에는 새뜸이라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있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때 인근의 수재민들이 모여들어 새로 살기 시작해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뜸, 새터, 신기(新基)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외에도 황정리로 속했던 마을 중에서 고무실(鼓舞室), 동내뜸(獨山), 오리골 등 3개마을은 폐동이 되어 이름만 전해진다.
고무실은 고동(鼓洞)으로도 불리는데 봉산마을에서 성주군 금수면 영천동으로 넘어가는 고무실재 아래에 위치했던 마을로 옛날 금씨(琴氏)성을 가진 부자가 이 마을에 살면서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내며 살았다하여 북고(鼓)자에 춤출무(舞)자를 써서 고무실(鼓舞室)이라 했다고 하는데 마을이 폐동된 사연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옛날 금(琴)씨 성을 가진 부자가 마을에 살았는데 어느 날 찾아온 스님을 박대하여 쫓아냈다는 것.
이를 고약하게 여긴 스님이 후일 다시 찾아가 마을 뒤 용바우를 깨뜨리면 후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고 이를 그대로 믿은 부자가 석공을 보내 시키는 대로 했더니 바위속에 있던 용이 사흘간 피를 흘리며 죽었고 이후부터 쇠락을 거듭했고 마을도 폐동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리골은 고무실 마을과 5리가 떨어져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한국전쟁중에 마을이 전소되고 말았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