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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대신동편(삼락동)

관리자 기자 입력 2008.10.02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마을이야기(169)
대신동편
▷삼락동(三樂洞)


 구화산에서 발원한 소하천을 경계로 교동과 나뉘어있는 삼락동은 교동과 함께 구읍으로 불리며 김산군의 읍치로서 조선시대까지 지역의 행정,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삼락동은 여말선초 승선(承宣)벼슬을 지내던 수원백씨 귀선(貴璇)공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비분강개하여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금릉부원군에 피봉된 조부의 봉군지인 삼락동으로 낙향한 이래 대대로 수원백씨 금릉부원군파의 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조선시대까지 금산군 군내면으로 속하여 구화산 입구의 상리, 동헌이 있던 중리, 연화지 인근의 하리 등 3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914년 인근의 금평(거문들)까지 통합하여 삼락동으로 고치고 1960년 상리, 중리, 하리를 삼락1동, 금평을 삼락2동으로 분동했고 1983년 문당동과 합하여 금산동으로 했다가 1998년 대신동으로 통합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락(三樂) 이라는 지명은 옛날 마을의 선비들이 맹자께서 말한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 즉 부모와 형제가 무탈하며 하늘과 사람에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뛰어난 인재를 얻어 교육시킨다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루고자 하는 뜻을 담아 삼락동이라 이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삼락동은 마을의 뒷산에 해당하는 구화산의 형세가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어 마을을 감싸고 전면이 열린 전형적인 노서하전(老鼠下田)형 즉,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와 부자가 나온다는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관아가 위치했던 삼락동 옥골일대


 구읍의 삼락1동 지역은 옛날 관아가 있던 앗골과 뒷내골, 감옥이 있던 옥골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 마을이 점차 발전해 상리, 중리, 하리가 되었다.


 삼락1동과 2동사이인 지금의 종합스포츠타운 일대에는 떠돌아 다니는 혼령에게 수령이 제관이 되어 제를 드리는 여제단(쫛祭壇)과 토지의 안전을 관장한다는 토신(土神)가 풍흉을 관장한다는 곡신(穀神)에게 수령이 제관이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렸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고 전한다.













 ▲거문들 마을입구


 여제단에는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무자(無子)요 하면서 세번 절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왔다고 한다.


 또 그 옆으로 애씨굴로 불린 언덕배기가 있었는데 옛날 돌림병으로 목숨을 잃은 주검을 버린곳이라고 한다.


 종합스포츠타운과 김천대학 너머에 있는 삼락2동 거문들은 임진왜란 때 피난온 남경양씨와 장수황씨가 정착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는데 마을의 형상이 거문고와 비슷하게 생겼다하여 거문고금(琴)자를 써서 금평(琴坪 )이라 적고 거문고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거문들로 변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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