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71)
대신동편
▷부거리(富巨里)
신음동과 교동을 부춘산 아래로 이어주는 도로변에 자리잡은 부거리는 조선시대까지 이웃한 금음리,금신리와 함께 금산군 군내면으로 속했었는데 1914년 이들 마을을 합해 금신(琴新)의 신(新)자와 금음(琴音)의 금(琴)자를 따서 신음동(新音洞)으로 했다.
부거리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함안조씨와 풍산류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 때 이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큰 부자가 많이 살아 부자부(富)자에 클거(巨)자를 써서 부거리(富巨里)라 했는데 1930년대들면서 마을이 점차 쇠락해 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거리마을의 청룡바위
마을주민인 前시의원 김영조(78세)씨에 따르면 마을 뒷산인 부춘산(富春山)은 예로부터 청룡이 舊우시장(現조각공원)방면으로 꼬리를 드리우고 교동방향으로 웅크리고 있는 명당으로 알려졌는데 일본인들이 경북선철도를 내면서 철로가 청룡꼬리에 해당하는 마을앞 청룡바위 일대를 잘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을의 유래비 앞에서
이때부터 마을부자들이 망해 타지로 떠나기 시작하더니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마을앞을 높다랗게 가로지르면서 부춘산을 배후로 직지천의 아름다운 절경과 천변의 드넓은 농경지를 보유한 부유했던 부거리가 쇠락과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앞 고속도로 터널밑에는 마을유래비와 마을주민 강문수씨가 지은 마을노래비가 섰는데 옛 영화를 되찾으려는 주민들의 의지와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씨가 더없이 아름답다.
▷금음(琴音)
부춘산을 기준으로 부거리마을과는 반대방향으로 자리잡은 금음마을은 임진왜란때 함안조씨가 피난을 와서 정착한이래 김천에서 부거리마을을 거쳐 아천,공성으로 연결되는 옛 상주방면의 도로변에 있었던 큰 마을로 부거리와 함께 대표적인 부촌으로 알려지고있다.
금음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의 형상이 풍수적으로 볼 때 여인이 거문고를 안고있는 형상으로 실제 마을 뒤 부춘산 중턱에 거문고 형상을 한 큰 바위가 있고 또 마을입구에는 부채를 펼쳐놓은 듯한 부채바위가 있어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면 부춘산 거문고바위가 거문고 소리를 낸다하여 거문고금(琴)자에 소리음(音)자를 써서 금음(琴音)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 마을입구에 있었던 부채바위는 마을이 앞으로 내려오면서 지금은 마을중앙에 위치한 형국이 되었는데 옛날 금음이 큰 도로변에 위치해있고 부자가 많이 살다보니 도적떼가 자주 출몰해 주민들을 괴롭히는지라 어느 날 마을을 찾은 고승을 후하게 접대하고 도둑떼를 막을 방도를 물으니 마을 앞 부채바위를 깨트려 땅속에 묻어버리라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을이 쇠락해지더니 마침내 도적떼가 들지 않게 되었는데 부자가 없는 마을에 도적이 찾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1979년 도로공사를 하면서 땅속에 묻혀있던 부채바위의 일부를 주민 전환득(73세)씨가 발견해 주민들이 다시 세우고 마을의 재번영을 염원하며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과 관련된 부채바위
인근의 시청앞 새터(신기)마을은 금음이 쇠락하면서 이주해 새로형성한 마을이라 하여 새터(新基),금신(琴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