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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마을이야기

용암동(용두동)

관리자 기자 입력 2008.11.20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마을이야기(176)
용암동편


 


 조선시대의 김천은 감천서쪽의 상신기(上新基)와 하신기(下新基), 갈마동, 중동, 상동, 자산, 좌동, 우동, 약수동, 부곡동을 일컫었는데 8백호가 넘지않는 작은 규모였다.


 이중 감천냇가로부터 모암산일대까지가 상신기, 하신기로 조선시대 “짐전장”으로 불리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김천장터에 속했다.


 일제시대인 1914년 상신기는 금정(錦町), 하신기는 일제에 의해본정(本町)과 욱정(旭町)으로 고쳐 불리었다가 1946년 상신기는 모암동, 하신기는 용두동과 감호동으로 고치고 1993년 용두동과 감호동을 합해 용호동, 또 1998년 용호동과 모암동을 합해 용암동으로 고쳤고 2008년 용암동과 성내동이 합해져 자산동으로 바뀌기에 이르렀다.


 


▷용두동(龍頭洞)


 용두동은 한신아파트앞 경부선 철도로부터 감천을 따라 대구통로인 김천교와 용두동 사거리를 이어주는 사각형태의 구역으로 이중 감천모래밭이 옛 김천장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상신기로 불리며 감천모래밭에 5일마다 장이 섰는데 우기에는 물이차서 장이 열리지 못하고 건기에는 전국의 보부상과 장꾼들이 모여 전국 5대시장의 하나로 번성했다.


 용두동이라는 지명은 고성산에서 발원해 남산공원,석천중,황금동교회를 거쳐 한신아파트 앞을 흘렀던 남산천(南山川)이 한신아파트앞에 모래를 쌓아 높은 모래언덕을 이루었는데 그 형세가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용우머리”라 하고 한자로 용용龍)자에 머리두(頭)자를 써서 용두동(龍頭洞)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용두동의 지명유래가 된 용우머리 일대


 


 지금의 경부선철교가 시작되는 한신아파트 앞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다고 볼 수 있다.


 김천장의 번성은 김천지방이 갖는 교통의 잇점과 관계가 있는데 김천지방은 전라도와 경상남도, 청청도, 경상북도 내륙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서 신라때 이미 역(驛)이 설치되어 역과 역을 연결하는 관로(管路)가 발달하였고 조선시대 초기부터는 인근 20여개의 역을 총괄하는 도찰방역(道察訪驛)으로 승격해 김천지방이 갖는 교통의 중요성이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김천도찰방역은 지금의 남산동 중앙초등학교에서 남산공원일대에 있었는데 공물의 수송과 집산이 활발하고 인마(人馬)가 내왕하는 역주변이고 낙동강을 통해 나룻배로 해산물을 수송할 수 있었던 용두동 감천변이 자연스럽게 시장의 발달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1년 일본의 주도로 경부선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일본인 기술자들과 이들을 상대하는 잡화상인들이 김천에 임시정착하면서 일본인들이 급속히 늘어났는데 1905년 철도공사가 끝나고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김천의 시장성에 매료되어 정착했고 추가로 일본상인들이 모여들어 용두동 김천장터주변에 자리를 잡고 헐값에 일대토지를 사들여 기존의 우리상인들은 지금의 감호동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1906년 약50세대 150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1907년에 150세대 6백명으로 급증했는데 김천장일대를 석권한 일인들은 김천역일대까지 상권을 넓히기 위해 1909년 김천역에서 김천시장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1916년 시기지정비사업을 실시해 용두동에 233채의 일본식 주택을 짓고 도로를 바둑판처럼 만들어 그들이 사는 마을이 중심이라는 뜻으로 본정(本町)이라 지명을 고쳤다.











▲1916년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바둑판모양으로 정비된 용두동 일대. 주택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당시 구획된 도로는 그대로 남아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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